이지원 | 런던열대의학위생대학(London School of Hygiene & Tropical Medicine) 개발보건학 석사
- 2025년 10월, 아일랜드 정부는 「아일랜드 자궁내막증 관리 국가 프레임워크(National Framework for the Management of Endometriosis in Ireland)」를 발표하고, 자궁내막증을 앓는 여성과 소녀를 위한 국가 차원의 표준 임상 치료 경로를 제시했다. 이는 그간 병원별 역량과 전문 인력 확보 수준에 따라 단편적으로 운영되던 진료 체계를 국가 차원에서 정비하고, 일차 진료에서 2·3차 전문 진료로 연계되는 관리 구조를 공식화하겠다는 조치다. 단순한 서비스 확대를 넘어 자궁내막증을 공적 보건 의제로 재위치시키겠다는 정책적 선언으로 해석된다.
- 아일랜드에서 자궁내막증은 오랜 기간 과소 인식·과소 치료되어 온 질환이다. 아일랜드 보건청(Health Service Executive, HSE)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자궁내막증 관련 진료 및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는 약 900명에 달한다. 이는 단순한 대기자 수의 문제가 아니라 진단 지연과 전문 치료 접근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인력·시설·전문 기술·예산의 제약 속에서 자궁내막증은 정책적 우선순위에서 상대적으로 후순위에 놓여 있었고, 그 결과 연구 투자와 전문 서비스 확충 역시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의료 전달체계의 한계를 넘어 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관리 방식 전반의 문제를 드러낸다.
- 자궁내막증은 자궁내막과 유사한 세포가 자궁 외부에 증식하는 만성 염증성 질환으로, 골반 내 장기뿐 아니라 장, 방광, 드물게는 횡격막이나 폐 등 전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확한 병인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으나 호르몬 의존적 특성을 보이며 가임기에 주로 발생한다. 아일랜드에서는 여성 7명 중 1명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흔한 질환으로 추정된다. 다만, 현재까지 완치법은 없으며 치료는 통증 완화와 삶의 질 개선에 초점을 둔다. 만성 골반통, 소화기 증상, 피로, 정신건강 문제 등은 학업·직업·사회적 관계에 장기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된다. 그럼에도 증상은 종종 ‘월경통의 연장선’으로 축소 해석되거나 정상적 경험으로 간주되어 왔고, 이러한 인식은 의료적 대응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 이번 프레임워크의 핵심은 단순한 서비스 확충이 아니라 ‘추정 진단(presumed diagnosis)’의 제도화에 있다. 기존에는 복강경 수술을 통한 병리학적 확인이 사실상 유일한 확정 진단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는 침습적 시술이라는 한계를 가지며, 일차 진료 단계에서 시행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 그 결과 많은 환자가 장기간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확정 진단을 받기까지 수년을 기다려야 했다. ‘확정 후 치료’라는 전제가 오히려 치료 개입을 지연시키는 구조로 작동해 온 셈이다. 이에 정부는 증상에 근거해 자궁내막증을 임상적으로 추정하고 치료를 시작하는 접근으로 전환했다. 약물 치료와 호르몬 억제 치료를 우선 적용하고, 증상이 호전될 경우 반드시 수술을 통한 확정 진단을 요구하지 않는 모델이다. 이는 ‘확정 진단 중심’에서 ‘증상 기반 선치료’로의 정책적 전환을 의미한다.
- 추정 진단의 공식화는 자궁내막증이 오랫동안 정상적 월경통으로 축소되어 온 맥락을 고려할 때, 환자의 통증 경험을 의료적으로 신뢰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결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진단 지연에 따른 이차적 피해를 완화하고 조기 개입을 확대하겠다는 점에서 정책적 의의가 있다. 다만 이 모델이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일차 진료에서의 상담 역량 강화와 약물 접근성 보장, 중증 환자를 적시에 2·3차 의료기관으로 연계할 수 있는 전문 인프라 확충이 병행되어야 한다. 선치료 전략이 수술적 개입이 필요한 사례의 지연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명확한 의뢰 기준과 수술 역량 확보 역시 요구된다.
- 실제로 의회와 시민·환자단체는 프레임워크 발표와 함께 일차 진료 중심 모델에 대한 의존이 과도할 수 있다는 점과, 중증 환자를 위한 수술 역량이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아일랜드는 임시 대응책으로 ‘자궁내막증 해외 수술 프로그램(Endometriosis Surgery Abroad Interim Scheme, ESAIS)’을 운영 중이다. 일정 요건을 충족한 환자는 해외 지정 의료기관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으며, 수술비와 기본 항공료가 지원된다. 다만 체류비 등 기타 비용은 개인이 부담해야 하며, 일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전문 센터나 외과의가 승인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 이번 프레임워크는 자궁내막증 관리의 국가적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추정 진단의 제도화는 진단 지연을 완화하고 치료 개입을 앞당기겠다는 정부의 정책적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성과는 진단 기간 단축, 통증 완화, 수술 대기 감소 등 구체적 지표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인력·시설·재정이 안정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제도 변화가 선언적 조치에 머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행 역량을 강화할 인력 확충, 전문 센터 투자, 안정적 예산 확보가 병행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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