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의 권력이론:여성들을 위한 이론인가?
        저자 강선미
        발간호 제037호 통권제목 1992년 겨울
        구분 ARTICLE 등록일 2010-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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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모더니즘의 권력이론 : 여성들을 위한 이론인가? -푸꼬의 권력이론을 
        중심으로-이 글은 Nancy Harsock(1990), :Foucault on Power: A Theory for 
        Women?" Feminism/Postmodernism, (ed.) Linda J. Nicholson(New 
        York:Routledge)를 완역한 것이다. 본래 이 글은 1987년 9월 라이덴 대학교에서 
        열린 "성별과 권력"(The Gender and Power)에 관한 회의에서 발표된 것으로 이 
        회의로의 일부로서 출판된 바 있다(The Gender of Power, (ed.) Monique 
        Lijnaar, Kathy Davis, Claudine Helleman, Jantine Oldersmaa, Dini 
        Vos(Leiden: University of Leiden, 1987)). 

        강선미(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 

        먼저 권력과 성별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일반적인 문제를 묻게 되면, 
        그 대답은 짐짓 자명하다. 즉 권력은 분명 남성의 것이며, 남성적인 것이다. 
        권력에 대해 논자들은 흔히 권력과 사내다움, 남성성과의 관련성을 언급하곤 
        한다(그 예로서 David Bell(1975), Power, Influence and Authori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8을 보라). 그러나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권력의 본질을 보다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사회를 
        구조지으며, 우리들의 종속을 규정하는 지배관계를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권력이 
        움직이는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유용한 이론이 필요하다. 
        어디서 그것을 찾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것을 발전시킬 것인가? 양성간의 
        권력 관계는 다른 종류의 권력관계와 비교될 수 있는가? 아니면, 성별관계는 
        독특하여, 이를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사회과학에서 
        현재 발전되고 있는 권력이론들은 양성간의 권력관계를 분석하는 데에 충실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러한 이론들을 각색하여 
        양성간의 관계를 적절히 개념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성별관계가 특수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집단들 간에 널리 
        통용되는 지배관계에 대한 많은 글들이 여성의 입장에서도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배와 종속의 경험 속에서 그 경험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권력이론들 
        간에는 매우 공통적인 기반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최근 사회과학이 
        발전시키고 있는 권력이론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그 
        이론이 여성이나 다른 피지배 집단들을 위해 유요하거나 충실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이론들이 우리들의 요구에 맞도록 재개념화되거나 
        각색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다른 글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제안된 구조주의적 대안을 포함하여 이러한 이론들을 숱하게 검토하였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뿐이다(Nancy Hartsock(1983), Money, Sex and 
        Power: Toward a Feminist Historical Marerialism (New York:Longman)). 나는 
        미셸 푸꼬에 의해 제시된 이론과 같은 후기구조주의의 이론들도 여성을 위한 
        권력이론을 제공하는데 실패하였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권력이 특수한 개념이라는 것, "필연적으로 이의가 
        제기되는(essentially contested)" 특징을 가진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즉, 
        권력에 대한 서로 다른 이론들은 그 내용과 인식방식에 대해서 서로 다른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권력에 대한 서로 다른 이론은 서로 다른 존재론과 
        인식론에 의거하고 있으며, 권력에 대해 여성학적으로 재고하려면 그 이론의 
        인식론적 토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여기서 나의 주장은 권력은 "필연적으로 
        이의가 제기되는(essentially contested)" 개념이라는 W.B.Gallie의 주장과 
        유사하다. 권력이 그러한 개념의 범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내부적으로 
        복잡하고 개방적이며, 공격적으로 혹은 방어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리이는 자신의 입장이 지닌 인식론적 함의를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전에 인식론은 물질적 환경이 다른 데서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성에 대한 권력이론, 즉 여성의 종속을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변수로 
        포함시키는 이론과 여성을 위한 권력이론, 즉 피지배자의 경험과 관점으로부터 
        출발하는 이론을 구분해야 한다. 후자의 이론은 여성들이 지배당하는 방식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수용능력, 행위능력, 강점들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능력을 권력관계의 잠재적인 변화, 즉 여성의 권력화(empowerment)를 
        위한 지침으로 사용할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단서를 붙이면, 여성의 권력화란 
        "일을 잘 처리하는" 단지 몇몇 여성들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다른 소외된 집단들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권력을 언급하게 되면, 즉시 "여성"이란 무슨 뜻인가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된다. 여성들간의 차이 문제는 최근 미국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우리는 여성을 위한 권력이론을 발전시키는 이론적 과제의 일부로서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여성들 간에 분리를 가져오는 많은 
        요인들, 즉 인종적 차이나 문화적 차이와 같은 요인들이 한편으로는 여성과 
        남성을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마도 여성을 위한 
        권력이론은 다른 집단을 위한 권력이론도 될 것이다. 우리는 차이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서 이러한 차이를 면밀히 인식하면서도 지금까지 소외된 집단들이 
        자신들을 명명하고, 스스로 말하고, 상호작용의 조건을 규정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 즉 세계에 대한 이해를 우리 스스로 구축할 수 있는 상황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론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하나의 일반론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다양한 인종의 목소리가 들려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그러한 
        이론에 대한 탐구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여성과 유색인 남성의 상황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공통 주장이 만들어 질 수 있을까? 백인 여성과 유색인 남녀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가? 서구인들과 그들이 식민지화한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가? 예를 들어 무조건적으로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로 미루어 우리의 상황이 세계에 대한 실질적인 
        요구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알게 되는지, 우리들의 이론을 무엇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궁극적으로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다. 서로 다른 집단들의 
        정치적 행동을 정초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지식론이 요청되는지? 이것이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이다. "소수집단"에 의해 생산된 이론들은 
        "다수집단"의 인식론과는 서로 다른 인식론에 근거하여야 하는가? 이론의 모색 
        자체가 다수집단의 담론에서 문제시되어 왔으며 전체화하는 것으로 비난받아 
        왔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소수집단의 제안들에 대하여 비슷한 문제를 제기할 
        것인가 혹은 비슷한 기준을 세워야 할 것인가? 

        소외된 집단들의 목소리를 포함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는 계몽주의 이론들과 같은 총체화하는 보편적인 이론들에 대항하여 논의를 
        펴온 사람들로부터 유익한 지도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많은 급진적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문화비평으로부터 사회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글들에 매혹되어 왔다. 작가들 중에는 푸꼬, 데리다, 로티, 료타르 등이 있는데 
        이들은 계몽주의 유럽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보편적 이성에 대한 선념에 
        대항하여 논의를 펼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인간역사를 포괄한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거부한다. 료타르를 인용하면, "총체성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자"(Jean-Francois(1984), The Pose-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y Press), p.81). 그 대신 
        그들은 특별한 상황적인, 다원적인 한정된 사회비평을 제안한다. 많은 
        여성해방이론가들이 제시한 현대비판에 합세하였다. 많은 여성들이 원문 속으로 
        속은 원문으로부터 무엇이 알려질 수 있고 없는지, 말하여질 수 있고 없는지, 
        읽혀질 수 있고 없는지에 대한 이들 작가들의 주장을 인정하여 왔다. 

        그들은 내가 제안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겉으로는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이론들은 이 프로젝트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기 보다는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들의 보편적 주장을 회피하고자 하는 열망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주장을 말로는 반대한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가정이 
        그들의 작업 속에 다시 스며든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18.19세기의 유럽 
        모더니즘의 문제를 회피하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들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지 못한 채 비판만 늘어놓고 있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세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던 이론이 주는 
        도움은 극히 적다(포스트모던 이론가들 중에는 부정의를 종식시키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여는 그들의 이론 속에서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배적인 인종이나 계급, 성이 아니며 우리 
        세계를 통제하는 소수에 속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들은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주변화되었는가?(언어사용에서 조건을 달고 명확히 해야 할 부분이 있다. 나는 
        우리들/그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그들"이란 분명히 지배적인 인종, 
        계급, 성을 나타내지만, "우리들"의 경우 그것은 동일한 집단도 아니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우리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하나의 "우리들"이란 전체화하는 
        유럽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계몽의 담론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축된 것이다. 
        나는 서구의 백인 여성들이 식민지화된 사람들의 물적 조건을 공유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계몽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유사한 입장을 
        공유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들의 온갖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서 어떤 체계적인 변화가 요구될 것인가? 최악의 
        경우에 포스트모던 이론은 상호작용의 조건을 규정하는데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정하는 계몽이론의 효과를 재현할 수 있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소외된 집단이 받아들이기에는 위험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1. 식민지화된 타자의 구축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나는 앨버트 메미의 
        [식민화 하는 사람들과 식민지화된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포스트모던 이론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과 몇몇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은유로서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주변화되어 온 우리들은 식민지화된 
        사람들이 식민지화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와 유사한 입장에서 논의에 
        참여한다. 가장 근본적으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가치를 박탈당한 
        "타자"의 철학적, 역사적 창조는 시공 밖에 있는 초월적이고 합리적인 주체, 즉 
        계몽철학의 화자인 주체의 창조를 위한 필연적 전제조건이었다는 점이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그 과정의 핵심을 다른 상황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선에는 악이 필요하고, 이상에는 물질이 필요하고, 빛에는 어둠이 
        필요하다"(Simone de Beauvoir(1953), The Second Sex, (trans.) H.M.Parshley 
        (New York: Knopf), p.72). 이러한 주제는 칸트와 같은 부르주아 철학자들의 
        작업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프롤레타리아가 보편적인 역사의 주체라고 
        하는 몇몇 마르크스의 주장에서도 이와 같은 사고방식의 반향을 찾아 볼 수 
        있다. 

        메미의 글에는 식민화하는 사람들과 식민지화된 사람들은 양자를 잇는 
        유대(bond)에 의해서 생겨나며, 이로 인하여 양쪽 모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파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식민화하는 사람들에 의해 묘사한 대로의 
        "타자"에 대한 초상을 그리는 동안 식민지화된 사람들은 식민화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아닌 모든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부정적인 성격이 그들에게 투사된다. 
        식민지화된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말해지며, 식민화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에 
        대해 감정이 과장된다. 게다가 식민화된 사람들은 사악하고, 퇴보적인데다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완전한 인간이 아닌 존재이다(Albert Memmi(1967), The 
        Colonizer and the Colonized (Boston: Beacon Press), p.82). 그가 식민지화된 
        사람들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동안 보봐르의 [제2의 성]을 읽은 여성해방론적인 
        독자들은 친숙한 감정을 감출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묘사를 숱하게 
        인지한다(예를 들어서, "남자가 나신을 주체와 자유로운 존재로서 주장하는 
        순간에 타자라는 생각이 나온다."고 한 보봐르의 주장과 비교해 보라(de 
        Beauvoir(1953), p.73)) . 

        메미는 이렇게 인공적으로 창조된 타자에 대하여 내려진 몇가지 결론들을 
        지적한다. 첫째, 타자는 언제나 "아닌 것", 결핍, 무효, 사회의 가치있는 
        자질들은 무엇이든지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앞 글, p.83). 둘째, 
        타자의 인간성은 "불투명한" 것이 된다. 식민화하는 사람들은 흔히 "당신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그들은 생각하는가? 아니면 직관에 따라 
        움직이는가?" 라는 말을 한다(여성해방주의적 독자라면 여성들에게도 영혼은 
        있는지, 아니면 이성능력 혹은 라틴어를 배울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몇몇 
        논의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메미는 반어적 표현으로 식민지화된 
        사람들이 만일 식민화하는 사람들과 수년 동안 살면서 그렇게 신비스럽고 
        불투명한 것으로 남아 있다면 매우 이상스럽게 보일 것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셋째, 타자는 인간 공동체의 동등한 개인적 성원들로 보이기 보다는 혼돈스럽고, 
        무질서한 익명의 집합체의 일부로 보인다. 메미의 표현을 빌면, 그들은 
        "복수형(plural)의 부호"를 지니고 있다(앞 글, p.85). 보다 일상적인 말로 
        옮기면, 그들은 모두 똑같이 보인다. 

        나는 여성들은 하나의 단일한 집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서구여성들이 유색인이나 식민지화된 남녀와 동일한 경험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나는 지배적인 백인의 유럽 
        중심적인 남성 지배계급에게 특징적인 세계를 보는 방식, 즉 전능한 주체를 
        중심에 놓고 주변적인 타자들을 일련의 부정적인 성격소유자로 만드는 
        세계분리방식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남자 혹은 여자)을 비인간화하려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 타자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그는 타자가 되도록 밀려난다. 식민화하는 사람의 웅대한 
        야망 속에서 결과적으로 그녀/그는 식민화하는 사람의 요구에 대한 하나의 
        기능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즉 순수한 식민지화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앞 글, p.86) 식민화된 사람은 역사의 주체가 되기를 멈추고 식민화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 될 뿐이다. 식민지화된 사람들을 역사로부터 추방하고 그의 
        모든 발전을 금지시킨 다음 식민화하는 사람은 자신의 근본적인 
        고정성(immobility)을 주장한다(앞 글, pp.92, 95, 113). 모든 제도에 의해 모든 
        인간 접촉 속에서 부과된 이러한 이미지에 대면하는 식민지화된 사람들은 이것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그것에 대한 비난은 식민지화된 사람들을 더욱 걱정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그녀/그는 권세를 가지고 식민화하는 비난자를 찬양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동방 건설에 대한 에드워드 세드의 설명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러한 
        과정의 작용방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보다 넓힐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이동의 정치적 차원을 매우 분명히 한다. 세드는 동양의 창조를 
        권력의지의 결과로 설명한다. "동양풍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동양에 
        대해 권위를 갖기 위한 서구적 양식이다" (Edward Said(1978), Orientalism (New 
        York: Vintage Press), p.3.). 

        흥미롭게도 이러한 권력관계의 구성에서 동양은 흔히 여성화된다. 그러나 이 
        동일한 과정에서 식민지화된 사람들의 반대, 동양의 반대, 여성의 반대, 즉 
        자신을 중심에 위치한다고 보고 자신의 사회 속에서 가치있게 생각되는 모든 
        자질들을 소유하였다고 보는 존재가 창조된다. 메미는 이러한 과정을 웅변적으로 
        설명한다. 

        ...식민화하는 사람은 결합된 공동체의 창설에 공헌할 수 있는 것보다는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차이에서 식민지화된 사람은 항상 
        평가절하되고, 식민지화하는 사람은 그들의 주체성을 거부하기 위한 합리화를 
        모색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식민주의자를 특성화하고 그를 식민지화된 
        사람들과 대비시키는 행동적 특성이나 역사적 혹은 지리적 요인들이 일단 
        분리되면, 이러한 차이를 메우지 않은 채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주의자는 그 요인을 역사와 시간에서 제거하여 진화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실제로 사회적인 것을 생물학적인 혹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라벨을 붙인다. 
        이러한 라벨은 식민지화된 사람들의 기본적인 본질로서 간주된다. 식민지화된 
        사람과 식민화하는 사람, 이 양자의 주인공들에게 부여된 핵심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이들 사이의 식민지적 관계는 즉시 결정적인 범주가 된다. 즉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며, 전자나 후자나 모두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Albert 
        Memmi(1967), pp.71-72). 

        세드도 이와 매우 유사한 점을 지적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럽의 문화는 
        동양에 대한 감독대리나 숨은 자아로서 자신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힘과 정체감을 
        얻었다"(Edward Said(1978), pp.3-8). 동양학이란 "우리"대 비유럽인을 정의하는 
        유럽적 정체성의 일부이다. 더 나아가서 연구대상은 또 다른 존재가 되며, 
        연구주체는 그에 대해 초월적이 된다. 왜냐, 동양인들과는 달리 유럽의 관찰자는 
        진정한 인간이기 때문이다(앞 글, pp.97, 108).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여성을 위한 권력이론에 대한 이론과 연구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는 위에서 예로 든 각각의 경우에 계몽이론들의 초월적 주체(=그 
        이론을 만드는 남자)의 토대(basis)를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 혹은 권력관계의 
        구성을 알 수 있다. 조금 달리 말하면, 가치를 박탈당한 타자의 
        이데올로기적/지적 창조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창조는 동시에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이론의 목소리(voice)라고 비난하는 보편화시키고 총체화시키는 
        목소리의 창조이다. 

        그들이 구성하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와 총체화시키는 목소리는 형식논리의 
        법칙 속에서도 기념된다. 낸시 제이(Nancy Jay)가 지적한 대로 우리가 물려 
        받고자 선택한 논리의 법칙은 질서의 원리(principles of order)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녀는 동일률(만약 어떤 것이 A라면, 그것은 A이다), 모순률(어떤 것도 
        동시에 A이며, A가 아닌 것이 될 수 없다), 배중률(어떤 것과 모든 것은 A나 A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녀에 의하면, "이러한 원리는 
        경험적 세계를 표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질서의 원리이다. 경험세계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자라고, 소멸하며, 물로 변하는 얼음과, 얼음으로 변하는 물처럼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Nancy Jay(1981), "Gender and Dichotomy," Feminist 
        Studies Vol.7, No.1, Spring, p.42). 

        이러한 질서의 논리적 원리는 내가 설명해 온 사고유형, 즉 세계를 A와 A가 
        아닌 것으로 양분하는 사고유형의 바탕을 이룬다. A가 아닌 쪽은 정규적으로 
        무질서, 비합리성, 기회, 실수, 비순수성과 연관된다. A가 아닌 것은 반드시 
        비순수하고, 무작위적으로 아무 것이나 쓸어 넣는 범주이다. 제이가 지적하는 
        단서는 유일한 긍정적 조건의 존재이다. 따라서 남자/여자/어린이는 그 
        함의에서는 매우 다르지만, 세계를 범주화하는 하나의 형식이다.(앞 글, p.47) 
        근본적인 이분법은 따라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기능한다. 내가 검토해온 글 
        속에서 웅변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이분법을 보존하는 것은 
        누구의 이해관계에서 인가? 누가 변화를 무질서로 경험하는가?(이것은 원래 
        제이(Jay)의 문제였지만 이제는 나의 것이기도 하다) 핵심은 타자를 창조하는 
        것은 동시에 스스로(himself)를 시공과 권력관계 밖에 존재한다고 설득할 수 
        있는 초월적이고 전능한 이론가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론적 관념의 물적 토대를 표현하고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논의는 지난 수십년 동안 세계적 규모로 거부되어 왔다. 비식민지화 투쟁, 
        청년운동, 여성운동, 급진적 해방운동 등은 다양하고 무질서한 타자를 대표한다. 
        이들은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요구하고, 이론가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두 가지의 근본적인 지적 이론적 
        과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건설이다.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즉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도록 허락받지 못했던 우리들은 자신의 과거를 
        재건하고, 우리 나름의 관점에서 미래를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의 첫번째 과제는 타자의 주체성, 즉 다면적이고 특수한 것이 될 
        주체성을 건설하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분리주의는 이러한 건설국면의 중요한 
        특성들이다. 버니스 리건(Bernice Reagon: 시민운동가, 여성해방론자, "Sweet 
        Honey in the Rock"그룹과 함께 하는 가수, 미국 국립박물관의 사회역사학자)은 
        그 과정과 문제를 웅변적으로 묘사한다. 

        (때때로) 그 사회에서 내내 외출해 있는 것은 너무 어렵고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 장소를 구하거든 문을 걸어 잠근 뒤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점검해 
        보십시오. 당신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함께 오십시오... 그 장소는 사람들이 
        당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가려내고, 당신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양생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가지고 자신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당신이 사회를 주도할 경우, 되고 싶은 사람을 만들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이것이) 양생이며, 또한 민족주의입니다. 어떤 단계에서 
        만일 당신이 자신의 이해를 위해 집단으로서 영향력을 미치고자 한다면 
        민족주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입니다(Bernice Reagon(1983), "Coalition 
        Politics: Turning the Century," Home Girls, (ed.) Barbara). 

        여하튼 아무래도 매우 의심스럽게 여겨지는 점은, "주체"의 본질,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일반이론에 대한 가능성, 역사적 "진보"에 대한 의심이 제기된 
        것이 주변화된 타자에 대한 재정의를 포함하는 "민족주의"에 그렇게 많은 
        집단들이 관여하게 된 바로 그 순간이었다는 점이다. 침묵 속에 묻혔던 많은 
        우리들이 스스로 이름붙일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하고, 역사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행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주체성의 개념이 문제시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우리들이 세계에 대한 나름의 이론들을 형성하고 있을 때 세계가 
        이론화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들이 바라는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진보의 관념과 인간사회를 체계적이고 
        근본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호해지고 의심스러워졌다. 왜 하필 지금 
        이론을 창조하려는 노력 속에 내재하는 권력의지에 대한 비판들이 가해지는 
        것인가? 나는 이러한 지적인 움직임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음모도 아니다). 그들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변화를 
        장악하려 시도하는 계몽의 초월적 목소리를 표상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이 택하는 특수한 형식들은 상상력의 실패를 지적하고 
        있으며 사상의 지배적 양식들이 계몽의 페러다임과 가치들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순히 문제들일 뿐이다. 이제 포스트모던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려면 관여하여야 한다고 하는 과업들이 무엇인지를 하나의 
        사례를 통하여 보다 정밀히 관찰하여 보자. 

        2. 푸꼬의 저항과 거부 
        푸꼬는 메미가 등장시키는 인물들 중의 하나를 표상한다. 나는 지금까지 
        식민화하는 자와 식민지화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 왔다. 이 양자의 지위는 
        실로 기본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메미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식민화하는 
        자와 그것을 거부하는 식민화하는 자의 구분을 중요하게 다룬다. 만일 
        모던이론들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식민화하는 자들의 관점을 
        표상한다면,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사상들은 리챠드 료티와 같이 내포된 
        권력관계들을 무시하는 사람들과 푸꼬와 같이 이러한 관계에 저항하는 사람들로 
        나눠볼 수 있다. 나는 푸꼬가 그것을 거부하는 따라서 고통스런 모호성 속에 
        사는 메미의 식민화하는 자를 표상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따라서 혁명과 창조와 
        건설의 과업에 유용한 인식론을 제공하는 데도 실패하는 인물이다(푸꼬에 대한 
        나의 주장은 앞으로 나올 나의 책 Post-Modernism and Political Chance에 훨씬 
        길게 수록될 것이다). 

        메미에 따르면, 그는 유태계의 튀니지인으로서 식민지화된 자 뿐만 아니라 
        식민화하는 자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거부하는 식민화하는 자의 어려움) 
        그들의 불가피한 모호성과 그에 따른 소외, 보다 심각하게는 그들의 행위할 수 
        없음에 대해 지나치게 잘 이해하고 있었다"(Albert Memmi(1967), pp.14-15). 
        그는 문화의 구체적인 관계 가운데 살면서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도피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을 시도하는 
        식민화하는 자는 배반자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식민지화된 자는 아니다 (앞 
        글, pp.20-21). 좌익의 식민화하는 자의 정치적 무능은 식민지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메미는 질문한다. 민중들, 혹은 돈 혹은 
        권력의 구체적인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 심각한 정치적 요구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동료시민들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식민화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일 것인지에 대한 어려운 정치적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다(앞 
        글, p.41). 

        이러한 확실성과 힘의 결여는 푸꼬로 하여금 그의 작업을 방법론적 텍스트에 
        쏟아 붓도록 만든다. 그는 분명히 어떠한 전체화하는 담론의 형태도 거부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성은 혼돈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진리는 
        장구한 역사과정에서 변할 수 없는 형태로 굳어진 오류일 뿐이다. 그는 일견 
        인간 존재가 자신의 통치권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삼아온 그 통일성을 흩뜨리고 
        분쇄하는 것에 찬성한다(Michel Foucault(1972), The Archaeology of 
        Knowledge(Harper & Row), pp.139-64). 즉 푸꼬는 모더니티의 거부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그는 감옥에 대한 사회적 행동에 참여해 왔다. 그는 분명 
        권력행사의 대상이 되어 온 사람들을 동정하고, 많은 투쟁들이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제시한다. 

        또한 감시와 처벌과 같은 작업에서 그는 경험적인 비판들을 통해 강제적 
        권력의 실상을 설득력있게 벗겨낸다. 그러나 그의 설득력은 한편으로 그가 
        거부한다고 주장하는 휴머니즘의 가치들을 사용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즉 낸시 
        프레이저가 지적한 대로 그 프로젝트가 정치적 설득력을 얻는 것은 독자들이 
        자율, 품위, 인권 등의 현대적 이상들과 친숙해 있고 그에 대해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다(Nancy Fraser(1983), "Foucault's Body Language: A Pose-Humanist 
        Political Rhetoric?" Salmagundi Vol.61, Fall, p.59). 게다가 푸꼬는 권력의 
        실상을 폭로하는 것은 변혁적이라기 보다는 탈안정화하는 효과를 가질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비평이 가진 힘을 명백히 제한하려 한다(Charles 
        Taylor(1984), "Foucault on Freedom and Truth," Political Theory Vol.12, 
        May, pp.175-76). 그러나 식민지적 지식인의 무력감과 소외감은 되풀이하여 
        표출된다. 따라서 푸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성은 전쟁으로부터 전쟁을 향하여 점진적으로 진보하여 가다가 마침내 
        법의 지배가 전쟁을 대신하는 보편적인 상호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지배의 체계 속에 폭력을 장착하고 지배로부터 지배를 향해 
        나아간다(Michel Foucault(1977),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Selected Essays and Interviews, (ed.) Donald Bouchard (Ithaca, N.Y.:Cornell 
        University Press), p.151). 

        또한 푸꼬는 지식인들이란 권력투쟁을 하는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그런 
        사람들과 단지 병존하는, 지방적으로 지역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로 보고 있다. 
        마침내 그는 모더니티에 반대하여 풍자시적이고, 고립적이고, 비꼬는 역사를 
        요청한다. 이러한 점들은 긍정적인 단계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푸꼬는 
        식민화하는 자와 식민지화된 자들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긍정적인 결과란 무엇인가? 

        푸꼬는 복잡한 사상가이다. 그가 거부하는 식민화하는 자로서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더욱 그의 사고는 복잡하고 모호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여기서 그의 
        작업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고 가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두 
        가지의 논점을 밝히려 한다. 하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종속된 자들에 대해서 그가 
        가지는 명백한 동정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다수라 주장하는 자들"인 
        지배자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와 관련하여 부분적으로는 
        타자를 지배하는 위치에선 사람들에게 권력관계들은 덜 가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계적으로 불균등한 권력관계들은 푸꼬의 권력에 대한 설명에서 
        궁극적으로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는 권력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 
        가하는 이상하고 반어법적인 비난이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전개하기에 앞서 우선 나는 몇 가지 제한점을 두고자 한다. 
        푸꼬 자신도 그가 저항하는 식민화하는 사람의 입장에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는 지난 10-15년간 지성인들의 지평에서 
        몇몇 양상들이 변화하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최근들어 분산되고 불연속적인 
        다양한 공세들과 "종속된 지식의 반란"이 눈에 띄는 특성이라는 점을 
        지적한다(Michel Foucault(1980), Power/Knowledge (New York: Pantheon), 
        pp.79,81). 이어서 이렇게 드러난 현상들은 

        ...사물, 제도, 실천, 담론 등에 대한 비판의 취약성이 점차 증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존재의 지반 자체 속에서 발견된 분명한 허약성... 이러한 측면들은 
        우리들의 몸과 일상의 행동과 가장 친밀하게 관련된 가장 익숙하고 가장 견고한 
        것 속에도 있다(앞 글, p.80). 

        다음으로 위에 인용된 글에서 그는 현대의 지식인들을 "허약한 후계자들"이라 
        지칭한다. 따라서 푸꼬 자신도 역시 피지배 집단의 탈식민지화와 항거의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성(gender) 
        분석에 적절한 권력이론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하는 나의 주장을 지지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나는 나아가서 푸꼬가 현대의 사회관계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데 
        여러가지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지배당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잡도록 요구함으로써 권력을 생산하는 수단이 된 고백의 
        발달에 대한 그의 설명을 예로 들 수 있다. 그가 
        주권/복종(sovereignty/obedience)의 전통적 문제들을 
        지배/종속(domination/subjugation)으로 대치한 점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감시적 권력(disciplinary power) 개념을 가지고 어떤 의미에서 자본 그 자체와 
        똑같은 팽창의 가능성을 소유한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은 주요한 진보이다. 이 
        밖에도 그의 공헌을 열거하려면 많겠지만 이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맡길 일이다. 
        대신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푸꼬가 그의 작업에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저항하는 식민지화하는 자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작업은 식민지화된 자 혹은 지배당하는 자의 요구에 부적절하거나 무관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두 개의 중점으로 돌아가자. 

        3. 푸꼬의 관점 
        한 마디로 푸꼬를 읽으면서 나는 푸꼬의 세계가 나의 세계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세계는 나에게는 심히 낯선 것이다. 사실 그가 이것이 
        우리의 세계라고 주장했을 때 나는 미국의 희극에 나오는 롱 레인저(Long 
        Ranger)와 "그의 충실한 인디언 동료"(이자 종복인) 통토(Tonto)라는 두 인물에 
        관한 농담을 떠올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두 사람은 호전적인 인디언들에게 
        추격을 당하고 포위되고 만다. 롱 레인저는 위험을 느끼자 톤토에게 돌아서서 
        이렇게 묻는다. "이제 우린 어떻게 하지?" 이에 대해 톤토는 대답한다. 
        "우리라니 무슨 말인가, 이 백인 녀석아?" 푸꼬의 세계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물들이 움직이는 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서 주체는 말살되거나 혹은 수동적인 
        객체로 재창조된다. 그 속에서는 수동성 혹은 거부만이 유일한 선택이다. 따라서 
        푸꼬는 말한다. 고백은 종교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교육학으로 
        "이주하였다"(Michel Foucault(1978), The History of Sexuality: An 
        Introduction (New York: Pantheon), p.68). 혹은 "가설들이 스스로 
        제안한다"(Michel Foucault(1978), p.91). 나아가서 그는 주체들이 지배하기를 
        그칠 뿐 아니라 권력과 같은 외부적 힘들(forces)이 몸에까지 접근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일종의 효과로서의 주체를 구성하는 것은 그러한 힘이 된다고 
        주장한다(Michel Foucault(1978), pp.142-43). 

        어떤 사람이 권력개념을 중요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이 권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온 평자도 있다. 그는 몇 가지 
        가능성을 설정한다. 우선 당신은 만일 권력이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다. 둘째, 당신은 당신이 권력이 있다면 무엇을 상상할 
        것인지에 대해 숙고할 수 있다. 셋째, 당신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어떤 
        권력이 필요할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다. 혹은 넷째, 당신은 우리들이 현재 
        이해하는 권력 형태들 외부에 있는 일정 범위의 사물들을 가정하기를 원할 수 
        있다. 그의 타당한 주장에 따르면, 푸꼬는 처음 두 가지 가능성에 매료되어 
        있다. 따라서 푸꼬의 권력에 대한 상상은 권력에 "거스리는"것이 아니라 
        "동조하는" 것이다(Edward Said(1986), :Foucault and the Imagination of 
        Power," Foucault: A Critical Reader, (ed.) David Hoy (New York: Pantheon), 
        p.151). 세드는 그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어떤 "전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푸꼬가 "권력과 동조한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지배집단의 관점에서 
        이해한다고 하는 여러가지 지표들이 있다고 믿는다. 우선 지배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푸꼬 자신이 노동자들의 지식에 대해서 말한대로 다른 "지식인"은 
        비합법적이거나 "공식적 지식 내에서 기능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것으로 보일 
        것이다(Michel Foucault(1977), p.219). 푸꼬가 다양하게 범주화한 대로 그들은 
        "반란의", "무질서한", "편파적인", "자율적인 생활"이 결핍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Michel Foucault(1980), pp.81-86). 다양한 "저항의 담론들" 혹은 
        "반과학"을 단순히 비체계적인 것으로 특성화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조직화된 
        물적 기반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Edward Said(1986), 
        p.154). 둘째로, 이와 관련하여 푸꼬는 권력관계들의 체계에 대해 저항하거나 
        그것을 폭로할 것만을 요청한다. 게다가 그는 종종 이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모호하다. 따라서 그는 종속된 자들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거나 그들을 "유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Michel 
        Foucault(1980), pp.83,85). 특히 그는 지식인들의 과업이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운동의 일부가 되기 보다는 이러한 운동들을 지배의 도구로 변화시킬 수 있는 
        권력의 형태에 대항하여 투쟁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변혁보다 저항을 강조하는 것은 푸꼬의 깊은 회의주의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권력은 무한히 팽창하고 침투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개된 
        저항의 담론들까지도 "부속"시키려는 시도를 할지도 모른다.(앞 글, p.88) 
        권력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는 위험은 현재의 체계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한 대담자에 대한 푸꼬의 대답에서 가장 명백히 언명되었다. 
        그는 다른 체계를 상상하는 것조차 현재의 체계에 대한 우리들의 참여를 
        확대시키는 것이 된다고 대답하였다. 덧붙여서 그는 더욱 사악한 것은 아마도 
        소련연방에서 일어난 일인데, 스탈리니즘은 사회적 변혁을 위한 노력에 가장 
        알맞는 결과일 수 있다고 제시한다 (Michel Foucault(1977), p.230). 푸꼬는 
        권력에 대한 단순한 저항을 고집하는데 이러한 논지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요구를 회피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으로 더욱 확대된다. 특히 마르크시즘을 
        과학으로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문화에 과학의 
        힘이 가지고 있는 해로운 효과를 미치게 하기 때문이다(Michel Foucault(1980), 
        pp.84-85). 푸꼬는 저항과 대적을 가능케하고 촉진시킬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설명을 생산하는 것이 그의 목표라고 언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자의 지식에 
        대해서 그가 붙인 공식적 지식의 입장을 채택하고 주변화된 우리들은 주변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지배관계들을 강화한다. 

        4. 권력의 사라짐 
        권력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푸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 보다 
        엄밀히 말해서 저항하는 식민화하는 자로서의 그의 관점 때문에 체계적인 
        권력관계들은 궁극적으로 그의 작업에서 사라진다. 이것은 나의 첫번째 지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로부터 본 지배는 평등으로 보이기가 쉽다. 푸꼬는 
        권력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권력은 

        다양한 권력관계들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권력관계들은 자신들이 
        작동하는 영역 내에 내재하며 그 영역은 그들 자신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권력은 끊임없는 투쟁과 대적을 통해서 변화시키거나 
        강화시키고 전복시키는 과정으로서 혹은 반대로 서로를 격리시키는 분열과 
        모순으로서 혹은 마지막으로 그들이 영향을 미치는 전략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Michel Foucault(1978), pp.92-93). 

        (매우 복잡한 정의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권력은 "영구하고, 
        반복적이고,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그것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천 
        속에 존재한다. 또한 권력관계들은 다른 관계들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내장된 것이다." 동시에 (그리고 아마도 모순적으로) 권력관계들은 비록 푸꼬가 
        지령을 내리는 상부가 없다는 점을 지적할 만큼 조심스럽다고 할지라도 
        의도적이고 주관적이다(Michel Foucault(1980), p.97). 권력에 대한 그의 설명은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나 저항이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독특하다 할 것이다. 

        푸꼬의 권력에 관한 설명에는 권력의 체계적 본성과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그것의 존재를 강조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동시에 각 상황의 이질성과 
        특수성에 대한 그의 강조 때문에 그는 사회적 구조들의 자취를 잃게 되었으며, 
        대신 개인들이 어떻게 권력을 경험하고 행사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개인들은 권력의 실그물 속에서 순환한다. 그들은 
        "항상 이러한 권력을 동시적으로 경험하며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앞 글, p.98) 
        개인은 권력이 강타하는 하나의 원자(atom)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어떤 몸과 
        담론이 개인을 구성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권력의 결과이다. 따라서 권력을 볼 
        때 그것이 타자적인 지배하는 단일한 개인이나 혹은 타자들을 지배하는 집단이나 
        계급이라 보아서는 안된다.(앞 글.) 

        이러한 움직임으로 푸꼬는 성별관계에서의 지배를 포함하는 지배의 입지를 
        정하는 문제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개인들이 권력관계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은 한 집단의 타집단에 대한 지배와 같은 관계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그의 설명은 여성, 남성, 혹은 노동자가 아니라 추상적인 
        개인들만을 위한 여지를 만들고 있다. 

        푸꼬는 다시 권력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식으로써 그물망의 이미지를 
        제안함으로써 권력을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또 다른 걸음을 내딛는다. 예를 들어 
        그는 19세기의 가족은 "다양한 지점에서 서로 연계된 쾌락과 권력의 그물망"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정식은 가족내의 중요한 권력차이들을 
        설명하는데 실패한다(Michel Foucault(1978), p.45). 그물망의 이미지는 
        반어적으로 권력관계들을 설명하면서 그가 그것들을 무시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나아가 부추긴다). 따라서 그는 권력은 일반적으로 "그물같은 조직"을 
        통해 행사되며 개인들은 "그물망 줄기 사이를 순환한다"고 주장한다(Michel 
        Foucault(1980), p.98). 지배는 이러한 이미지의 일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그물망의 이미지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체계적인 지배보다는 
        평등과 대리자라는 함축을 지닌다. 게다가 때때로 푸꼬는 우리들은 동등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같은 밑바닥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처지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 같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권력은 바닥으로부터 
        나온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양분법적인 적대는 없다. 오히려 다중적인 
        힘의 관계들이 있다. 이는 생산, 가족 등의 기제 속에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나아가 "전체로서의 사회조직체를 관통해여 달리는 분열의 광범위한 효과들"의 
        토대가 된다(Michel Foucault(1978), p.94). 분명히 권력의 분석에서 푸꼬는 
        중앙 혹은 꼭대기-주권으로부터 시작하기보다 오히려 저마다 나름의 역사를 지닌 
        "미세한 기제들"로부터 출발하여 상승적인 권력분석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기제들이 어떻게 지배를 받아왔으며, 어떻게 보다 세계적인 
        지배의 형태들로 변화되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물론 피지배집단들이 자신들의 
        지배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여라는 사실에 머물기보다 
        이러한 참여가 강요되는 수단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다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권력의 "상승적 분석"에 대한 푸꼬의 주장은 우리들로 하여금 
        희생자들을 비난하는 설명에 참여하게 만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푸꼬는 권력은 "실핏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그 말단에서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Michel Foucault(1980), p.95). 그는 
        권력을 주권자가 아니라 지역적인 물적 제도들에 위치지우는 예로서 고문과 수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실핏줄이라는 권력의 이미지는 권력은 어디에나 있다고 
        하는 결론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몸에서 실핏줄이 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 
        실제로 푸꼬의 권력은 "전 사회적 조직체게 스며있다"거나 "무소부재하다"고 
        주장하는 언어를 자주 사용한다(Michel Foucault(1978), pp.92-93). 따라서 모든 
        사회생활은 권력관계들의 그물이 된다. 이러한 관계들은 대규모의 사회적 구조 
        수준에서가 아니라 매우 지역적인, 개인적인 수준들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나아가 푸꼬는 학교, 감옥, 가족과 "감시" 제도들 속에서의 성장치(sexuality)의 
        발달과 같은 다양한 사물들 사이에서 보이는 중요한 유사점들을 지적한다. 모든 
        사물은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권력은 어디에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 
        어디에도 없다. 

        마지막으로 푸꼬는 모더니티를 단번에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승인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엇이 대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푸꼬가 근본주의의 발판과 료티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인가된 "발판없는 희망"이는 양자를 모두 거부하기 때문에 
        어떠한 발판도 없이 서 있으며 따라서 저항의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푸꼬에 따르면, 만일 우리들의 저항이 성공한다면 
        우리들은 단순히 우리들의 담론적 정체성을 다른 것으로 바꾸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억압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Gad Horowitz(1987), "The 
        Foucaultian Impasse: No Sex, No Self, No Revolution," Political Theory 
        Vol.16, No.1, February, pp.63-64). 

        "다수집단"이나 푸꼬와 같이 "다수집단" 혹은 강자(the powerful)의 관점을 
        채택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과거의 지나친 자기과신에 대하여 저항하고 
        거부함으로써 가장 위대하고 가능한 정치적 봉사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얻는 메세지는 우리들이 모더니티의 프로젝트를 
        포기하거나(리챠드 료티가 제시하는 대로) 담론을 대치하여야 한다는 것이거나 
        혹은 우리는 단순히 우리들에게 개방된 유일한 전략으로서 저항의 몸짓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새롭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프로젝트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두가지의 선택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5. 여성을 위한 이론들을 향하여 
        보편화하는 이론의 초월적인 음성에 의하여 주변화되어온 우리들은 료티처럼 
        권력관계들을 무시하거나 푸꼬나 료타르 같은 인물들이 제시하는 대로 그것들에 
        저항하는 일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변화시켜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마르크스에게 빚지고 있는 
        몇몇 주요한 특성들을 가지고 수정하고 재구조화한 이론을 필요로 한다. 

        우선 우리는 푸꼬처럼 주체성이나 주체의 관념들을 제거하고 개인이란는 
        관념을 권력관계들의 효과로 대치하기 보다는 우리들을 역사의 객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구성하는 역사적, 정치적, 이론적 과정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역사를 만든 자들의 객체일 뿐 아니라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들의 비존재는 유일자, 중심, 일부의 작은 
        인구집단이 모두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일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식민지의 독립투쟁, 인종해방, 성해방을 위한 투쟁 등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주체로서 구성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은 보편주의적 주장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전제조건들을 창출하는데 근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이 실제로 누구인가'를 규명해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내가 사용해 온 거짓된 "우리들"을 그 실상의 
        다중성과 다양성으로 와해시키고 이러한 구체적인 다중성으로부터 주변에서 본 
        세계에 대한 설명, 즉 위로부터의 관점이 지닌 허위성을 폭로하고 중심자들 뿐만 
        아니라 주변자들도 변화시킬 수 있는 설명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리들의 관점을 종속되고 분열적인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지식으로 다루는 세계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나는 또 하나의 전체화하는 거짓된 보편적 담론에 대한 건설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이성"의 초월적이고 탈체화된 음성의 
        관점을 채택하거나, 정확하고 체계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들의 세계에 대한 설명 또한 계몽주의 사상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부과된 대안들에 의해 감금될 것이다. 다른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주변화된 자들의 음성에 의해서(아마도 그들에 의해서만) 
        발전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들의 주변화의 역사는 전체화하는 담론을 
        창조하는 것에 대항하여 일할 것이다. 이것은 억압이 "보다 나은"사람들을 
        창조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반대로 지배와 주변화의 경험은 많은 상처를 남긴다. 
        그보다는 주변화된 집단들이 자신들을 보편적인 "남자"로 오인할 가능성이 
        덜하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모두의 경험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남성이 아님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세계 경험을 모두의 경험으로 가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다양한 경험들을 명명하고 설명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우리들의 공통성인가? 무엇이 우리의 차이인가? 어떻게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부과된 타자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특수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둘째로 우리들은 권력관계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단순한 담화나 
        담론이 아니라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인식론적인 근거 위에서 일해야 
        한다. 권력이 억압적인 사회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을 위한 
        목적으로서의 담화는 좋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할 경우 
        우리들의 세계에 대한 일정한 체계적인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모더니티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우리가 세계를 실제로 
        알기나 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물어야 할 
        좋은 질문이다. "그들은" 적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바의 
        세계나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세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이는 옳은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미지대로 뿐만 아니라 그들의 
        환상의 이미지 대로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우리 자신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려면 우리들은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셋째, 우리들은 우리들의 실제적인 일상의 활동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권력이론을 필요로 한다. 비록 그 이해가 종속된 
        것일지라도 이는 현재한다. 여기서 나는 모든 사람이 지성인이고 우리 모두가 
        인식론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람시의 주장을 재확인한다. 따라서 문제는 
        "소수집단"에게 있어서 이론은 우리의 다양한 실천 속에 있는 인식론들을 
        "읽어내는" 것이다. 나는 다른 데서 "입장론"의 인식론-마르크스의 근본적인 
        입장과 매우 유사성을 가지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옹호했었다. 나는 내가 
        거기서 주장한 것의 일부를 수정하는 일면, 나는 물질적 생활(마르크스 
        이론에서의 계급적 위치)은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이해를 구조화할 뿐만 아니라 
        제한하며, 지배의 체계 내에서 지배자들의 시각은 모두 편파적이고 사물의 
        실제적인 질서를 전도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포기할 수 없다. 

        넷째, 우리의 권력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대안들을 창조하는 것의 어려움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지배적인 계급, 인종, 성은 물질적 사회관계들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며, 모든 부분들이 이 관계 속에 참여토록 강요되고 있다. 
        그들의 시각은 따라서 단순히 오류라거나 오도된 것으로 일축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피지배집단들은 그들 자신의 이해를 위해 투쟁하여야 한다. 이에 
        대한 성취 여부는 정치적 투쟁을 통해 성장하는 이론화 작업과 교육에 대한 
        요구로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참여적 시각에서 억압된 자들에 대한 이해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이 
        비인간적이라는 점을 폭로하며, 따라서 정치적 행동에 대한 요청을 담고 있다. 
        즉 여성들, 피억압자들을 위한 권력이론은 참여로부터 고개를 돌리도록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관계들의 변화와 그를 위한 참여를 요청한다. 

        중요한 단계로서 우선 우리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지배문화에 대한 비판을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고, 둘째로 대안을 창조하는 
        것이다. 다양한 "소수집단"의 경험들이 서술되고 이러한 경험들이 사회의 
        지배적인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의 토대로서 가지는 의의가 보다 잘 
        인지될 때 우리는 적어도 계급 뿐만 아니라 인종과 성의 현실에 대해 감수성을 
        지닌 세계에 대한 설명을 구성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를 
        부연하자면, 문제는 단순히 우리들을 재기술하거나 세계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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