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현대화 개혁정책과 여성문제
        저자 김염자
        발간호 제036호 통권제목 1992년 가을호
        구분 ARTICLE 등록일 2010-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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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Ⅰ. 문제의 제기 
        Ⅱ. 개혁정책과 여성정책 
        Ⅲ. 여성계의 대응과 참여현황 
        Ⅳ. 개혁과정중에 나타난 여성문제 
        Ⅴ. 전망 


        I. 문제의 제기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아시아의 각 민족이 오랫동안 염원해 
        오던 근대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 종전 후 4년 남짓한 시간동안 중국 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정치적 대립과 투쟁 끝에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어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고, 중국국민당이 주도해왔던 국민정부는 대만성으로 
        옮겨가서 중화민국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중국대륙에 국가를 건설한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의 지도노선에 
        따라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목표를 수립하고 추진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치목표와 중국사회의 현실적인 여건과의 괴리는 끊임없이 
        갈등과 혼란.정치적 균열을 거듭하였지만 모택동의 영도력은 그의 사망 때까지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2년 봄 임표사건은 문화혁명의 결정적 과오를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1976년에 들어서서는 1월에 주은래 사망, 7월에는 주덕 사망, 하북성 
        당산현의 대지진, 9월에는 모택동 자신의 사망으로 이어지는 대충격을 
        중국사회가 입게 되었다. 그후 문혁파의 세력갈등(화국봉주석과 
        4인방:장춘교.요문원.왕홍문.강청의 권력쟁탈)은 모택동 정치노선의 계속적인 
        추진을 어렵게 만들었다.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약칭)는 1976년 10월 이래 당의 혼란된 지도력을 정리하고, "계급투쟁을 위주로 
        한다"는 당의 정책구호를 "전당공작의 강조점과 전국 인민의 주의력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전환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건국 30년에 
        걸친 격동의 정치적 진폭을 되풀이 해 온 중국이 결국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실질적인 기반을 형성하기 위한 이른바,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 등 4대 
        현대화 개혁방침을 확한 것이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제11기 6차 전체회의에서 채택, 통과된 "건국이래 당의 역사적 무제에 관한 
        결의"(각주:[관우건국이래 당적약간 역사문제적 결의](1985) 수정본 
        (북경:인민출판사) 참조. 국내에서도 [전통중국 현대사] (허원 역. 1990, 
        서울:사계절)로 번역되었다)로서 모택동의 정치목표로부터 실무파의 
        개혁.개방정책으로의 전환을 확인하는 합법적 절차를 밟았던 것이다. 

        탈문화혁명.비모택동화를 진전시키기 위한 등소평체제의 실용주의 노선(논자의 
        규범적 가치관에 따라 수정주의.시장경제적 처방 등으로 불러지지만 필자는 
        실용주의로 보고자 한다.)은 과거의 닫힌 중국에서 세계를 향하여 중국의 열린 
        모습을 보이려는 개방과 개혁을 표방하면서 건국 100년이 되는 2천년대 
        중반까지는 중진국 대열에 오르기 위한 노력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인구 12억의 거대한 중국의 개혁정책의 성과를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분명 
        시기 상조적 작업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많은 오류와 제한성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적 이해가 있기를 기대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현대화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많은 견해가 있을 수있지만 현대화란 한 사회의 변혁 방향의 종합적인 
        개념이며 또한 선진적인 일종의 역사운동이 아닌가 한다. 크게는 사회적 기술과 
        경제발전, 정치와 문화발전이라는 두개의 축이 무한한 변혁과정을 거치면서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으로 최고의 선을 향하는역사의 진행이며 실질적인 합리화 
        문제라고 보아서 큰 무리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한 사회.국가는 국가.경제.사회.인간이라는 4개의 분야별 
        현대화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참다운 현대화를 위한 합리적 목표달성이 
        가능하리라는 설명이 될 것이다. 즉, 

        ①보다 유효한 통치와 체제 보존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국가권력기구의 
        현대화 

        ②국가를 유지해 갈 수 있는 수요경비를 충당할 수 있는 상품생산발전과 
        공업화의 실현이 가능한 경제의 현대화 

        ③사회관계의 합리화, 신분 기타 불합리한 자의적인 지배.종속관계가 아닌 
        인간의 기본적 평등성을 인정하는 법적 지배관계의 확립 

        ④개인의 주체성을 인식하는 강렬한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평등주의에 입각한 보편주의적 윤리의식의 확립 

        등으로 현대화된 사회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 모두의 이해와 참여라는 대전제 위에서만 추진이 
        가능하며 일정 정도의 성과를 기대하면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역사운동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중국이 추진해온 4대 현대화 개혁정치는 과연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가 묻게 된다. 

        본 연구는 근대사회에서 비로소 중국여성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신중국 건국 이후에는 남자와 동등한 법적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음을 
        전제로 하였을 때 4대 현대화 개혁이라는 역사적인 격동 속에서 여성이 개혁의 
        주체로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요구되었는가? 여성들이 개혁정책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그들의 능력과 공헌을 인정받을 수 
        있었는가? 여성들은 여성자신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적절하게 
        대응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사회적.가정적 문제는 없었는가? 있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며, 그 해결방안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해명해 나가는 과정에서 중국대륙에서 발간된 
        문헌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이는 종래 현대중국에 관한 
        연구, 특히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에 관련된 연구는 외국학자들의 연구성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에 비하면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2억 인구의 절반인 중국여성이 처한 입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한계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II. 개혁정책과 여성정책 

        1.개혁.개방 정책의 수립과정 

        1949년 3월 전후 중국의 내전(중국공산당은 인민해방전쟁이라고 함.)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이어지리라는 확신을 얻고 공산당은 건국을 위한 
        정치.경제제도의 장기적.안정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기본적 전략을 확정하기 
        위하여 7기 2중전회의(1949.3.5~13, 하북성 평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모택동은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앞으로 당의 공작중심을 
        향촌으로부터 도시로 옮겨야 하며 당의 중심의무는 생산력 회복과 발전을 통하여 
        위대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공업국가를 지향하겠다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정치.경제.외교의 기본정책(각주: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1949.9.29) 제3조(대한민국국회도서관, [중공의 신헌법.당헌.규약.강령 
        및 요강집], 1979, p.75참조)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경제와 문화가 낙후한 국가인 중국이 완전한 사회주의 성격의 
        생산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중국이 "경제는 
        국영경제.합작사경제.농민과 수공업자의 개체경제.개인자본주의 경제 및 
        국가자본주의경제로 구성되어 사회경제 전체의 발전을 촉진하기로 
        합의하였다"(각주:앞글, 제26조). 이것은 "경제법칙은 일종의 자연법칙이며 한 
        사회가 스스로 변화해가는 운동의 자연법칙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연적 발전단계를 뛰어넘을 수도 법률로써 취소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이론과도 접합될 수 있는 정책노선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러한 합의나 원리를 무시하고 농업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의 기초 위에서 국가권력을 독재화하고 당을 독단적으로 하는 행위로서 그의 
        영도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유소기를 비롯한 실무파 당료들에 의한 
        비판과 반대에 부딪피면서 충돌과 좌절을 거듭하게 되었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가발전을 중단하는 결과를 빚었던 것이다. 1972년 
        임표사건이나 1976년 그의 사망 후 문혁파 내부모순과 갈등이 그 대표적인 
        결과라고 하겠다. 

        1973년 8월 중국공산당은 10차 중앙위원회를 열어 '비림비공운동'(임표의 
        반혁명수정주의 노선과 공자의 극기복례(노예제도의 부활이라고 해석됨)를 
        비판하기 위해 1972년부터 비림정풍 운동과 존법반유 운동을 결합하여 전개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탈문화혁명의 조류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75년 1월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 신헌법(약칭7.5헌법) 제정안이 
        채택되었다. 주은래 수상에 의해서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의 4대 현대화 
        정책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후 문혁파와 현대화를 추진하려는 개혁파 사이에 치열한 내부각축이 
        전개되었고, 1976년 1월 주은래의 병사는 또다른 측면의 정치적 대립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주은래 수상 장례식 석상에서 등소평 부주석은 
        조사에서 4대 현대화 노선을 계승할 것을 서약함에 따라 문혁파와의 격렬한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1976년 2월부터 문혈파의 이른바 주자파(당내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걸으며 집권하고 있는 파벌의 약칭) 캠페인이 전개되었고 이에 
        대응하는 개혁 추진세력은 물론이며 중국청년들의 민주운동이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1976.4.5). 이것에 책임을 지고 등소평 
        부주석이 다시 실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 주덕과 모택동의 사망은 
        문혁파의 좌우세력간의 대결 끝에 사인방을 꺾고 화국봉이 주석의 자리에 올라 
        이른바 '양개범시'(각주:화국봉의 집권시기인 1977년 2월 7일 인민일보에 실린 
        "학호문건조주강"이라는 제목의 사설에 "모주석이 결정한 정책은 모두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모주석의 지시도 모두 빠짐없이 따를 것"이라는 표현을 
        화국봉의 전체 정치노선의 대변이라고 파악하여 신정권이 경멸적으로 비판한 
        구호이다)파가 한동안 집권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아래 다시 중국공산당은 10기 3중전회의(1977.7.15~21)를 개최하여 
        사인방의 당적과 직무를 박탈하는 한편 등소평의 재복적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복권된 등소평은 전국인민대표대회(1977.8.12~18) 폐막사에서 "전당.전국.전국 
        각민족 인민 모두가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받들고 금세기 안에 위대한 
        사회주의 현대화를 추진하여 세계의 강국을 건설하자"는 제안을 하였던 것이다. 
        곧이어 화국봉의 제5기 전국인민대회 1차회의(1978년 2)에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단결하자"는 정치보고가 채택 통과됨으로서 현대화를 
        향한 국가정책방향이 확정되게 되었다. 곧이어 열린 제11기 3중전회(1978.2)에서 
        4대 현대화 개혁사업이 통일적인 국가목표로서 최종적으로 채택 통과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모택동 지도노선의 구호로 사용해왔던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삼고 무산계급독단 아래 계속적인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이 아닌 공업화, 
        개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던 건국 초기의 국가정책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2.개혁정책의 내용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마르크스주의사상을 기초로 하는 중국의 현대화 정책내용은 '4가지 전제.4가지 
        기본원칙, 한가지 중심과 두가지 기본점'으로 집약될 수 있다. 

        가.네가지전제(각주:등소평이 1980년 1월 16일 당중앙위원회가 소집한 
        간부회의에서 행한 "현재의 상황과 개혁의 임무"라는 연설에서 제시한 
        것이다([등소평문선(1975~1982)](1983), 북경:인민출판사, pp.203~37참조) 

        1)견고불변하여 시종해서 관찰할 정치노선이 있어야 한다. 즉, 전국 각민족 
        인민은 단결하고 모든 적극적 요소를 동원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분발 노력하고 
        앞장 서서 보다 많이 빨리 좋게 그리고 절약하여(각주:공산당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2중전회에서 채택되었던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의 슬로건이다. 
        즉, 다란 생산의 증가 공장.학교.철도.도로의 건설을 말하며 쾌는 공업농업의 
        생산이나 문화교육발전의 속도를 증가하는 것이며, 호는 생산품의 질과 양을 
        향상시키는 것이고, 생은 절약.검약하여 낭비를 하지말자는 것이다) 현대화 
        사회주의 강국을 이룩하도록 해야한다(섭검영, 경축건국 30주년 기념강화 
        1979.9.29). 현대화 건설은 여러분야의 종합과 평형이 이루어져야 하나 
        최종적으로는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사회주의 제도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구체적인 방법과는 다르다. 

        2)안정단결의 정치적 국면이 마련되어야만 한다. 민주와 법제의 발전이 
        견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약진 4대방법(각주:민중이 자신의 의사를 발표하는 
        권리로서 1978년 제정된 헌법 제45조에 보장되었으나 1980년에 삭제되었다)은 
        당중앙이 취소하여야 한다. 

        3)각고분투의 창업정신이 있어야 한다.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이용하여 
        대외무역을 개선하여야만 하지만 자력갱생을 위주로 하는 생산을 발전시킨 
        위에서 생활을 점차적으로 개선할 뿐이다. 노동에 따른 분배방법을 채택하여 
        특별한 공헌이 있는 개인과 단위에 물질적 정신적 포상을 할 것을 주장하며 
        일부의 사람, 지역이 많이 일하면 많이 얻어서 먼저 부유해지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확고불변의 방침이다. 

        4)사회주의노선을 굳게 유지하고 전문지식과 능력을 갖춘 젊은 간부들이 
        있어야 한다(간부의 지식화.전업화.년경화 혁명화를 역설). 

        나.네가지 기본원칙 

        서단민주벽(북경이 서단거리에 있으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자보를 붙혔던 
        담벽)으로 상징되는 1978년부터 1979년에 걸친 중국청년민주운동.반체제 운동을 
        감안하여 중국은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국가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것이다. 즉, 1)사회주의 노선, 2)프롤레타리아 독재, 3)공산당의 영도, 
        4)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사상 등이 네가지 기본원칙이다. 

        다.1개중심과 2개의 기본점 

        1987년 13차 전국대표 대회에서 확정한 정책방향으로서 경제건설 중심과 4항 
        기본원칙과 개혁개방을 굳게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현대화 건설은 실사구시적인 실천성과 마르크스의 
        자연법칙론적 경제이론의 입장에서 그 원칙성과 과학성이 가미된 실천, 
        실용노선인 것이다. 

        이것은 건국 30여년을 지탱해왔던 모택동의 농업사회주의 원칙위에서 
        행하여졌던 평균주의와 평생고용(철반완)이 허용되지 않는 경쟁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정책이라고 하겠다. 전민국유제로부터 개인생산청부제.집체도급제 등이 
        허용됨에 따르는 생산의욕의 상승과 생산의 증가라는 긍정적 평가도 가능하나 
        중국인들은 개혁.개방의 충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고도의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건설하기 위하여 중화민족이 이상, 
        도덕, 문화, 기율을 가질 수 있도록 소질과 수준을 높이자는 사유운동을 전개할 
        것도 결의하였다(각주: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1986), "사회주의 
        정신문명건설지도 방침에 관한 결의", [인민일보] 1986년 9월 29일자). 요컨대 
        1970년 후반에 확정한 4대 현대화 개혁.개방정책이 시행된 1980년대의 중국의 
        개혁을 중국적 특색을 고려한 초급단계의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경제건설을 목표로 대외개방과 대외국인의 투자를 증가시키기 위한 7개의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대만과의 평화로운 조국통일정책도 모색하는 것으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개혁.개방정책을 더욱 촉진해 나가기 위하여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법제화를 추진하여 1979년도에는 <지방각급 인민대회 및 인민정부 
        조직법>, <전국인민대회 및 지방각급인민대표대회 선거법>, <인민법원조직법>, 
        <인민검찰원조직법>, <형법형사소송법>, <중외합자경영기업법>을 1980년도에는 
        <국적법>, <혼인법>, <중외합자경영기업소득세법>, <개인소득세법>, 
        <중외합자경영기업노동관리규정>, <중외합영기업의 건설용지에 관한 잠정규정>, 
        <중외합자경영기업등관리법>, <환경보호법.학위조례>, <변호사 잠정조례>, 
        1981년에는 <외국기업소득세법>, <경제계약법>, <민사소송법>, 
        <중국인민해방군의 전인대 및 지방각급 인민대회대표선거법>, 
        <사형사건비준문제에 관한 결정>, <형사사건처리기한에 관한 결정>, <공장법>을 
        비롯한 경제관계 70여종, 1982년에는 <헌법의 개정>, <혼인등기법> 등이 
        제정되었다. 무엇보다도 형법의 제정은 건국 30여년 동안의 법률에 의한 
        사회통제기능의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와 법제라는 군중노선상의 변화는 문혁기의 임시권력기구로서의 
        지방혁명위원회를 지방인민정부로 전환하여 성장, 시장, 현장 등의 직명을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결국 모택동의 영도노선이 이데올로기 - 정치체제 - 생산관계 - 생산력의 
        순서에 따른 현상의 변화를 제시하였으나 개혁정책은 생산력 증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생산관계 - 정치체제 - 이데올로기의 창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정치개혁을 생산수단, 생산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실용주의 노선을 향한 등소평체제의 
        개혁정책의 핵심을 정치적 개혁을 수반하지 않은 채고 생산효울을 극대화하는 
        경제개혁중심 정책을 확정, 추진하는데 주력해 왔던 것이다. 

        3.여성정책 

        중국공산당은 창당이래 남녀의 성의 평등이라는 고상한 이론을 주장하였지만 
        실제의 통치 과정에서는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에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건국이전부터 법적, 제도적으로 남녀동권을 규정하는 
        조치가 행해졌으나 기본적으로 여성의 물질적 기초의 확립이라는 전제 위에서만 
        여성이 사회적으로 실제적 남녀동등이 가능하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여성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각주:김영자(1988), "중국국민당 부녀정책에 관한 
        연구", [이대사원] 22.23호, pp.335~68. ______(1990), "중국혁명과정의 
        부녀인력동원 정책연구 - 공산당 부녀정책을 중심으로", [여성학논집] 
        7(서울: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 pp.23~42). 즉 1950-60년대에는 농업생산 
        대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민공사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생활의 사회화 정책은 
        여성의 취업과 사회활동을 보장해주는 조처였다고 하겠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철저한 의무의 수행을 통한 여성의 경제적 기초가 어느 정도 다져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정책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70년대 중반까지의 문화혁명은 모택동사상의 철저한 
        학습을 통한 계급투쟁과 무산계급독단의 혁명과업을 이룩하는 
        혁명투사.생산대열의 전사로서 남녀동지가 동등하게 참여해야 하며, 참여할 수 
        있다는 혁명역량을 고조시킨 결과, '철의 처녀', '여자벌목대', 
        '여자석유탐사대'와 같은 중노동 종사자까지 배출하게 되는 혁명역량과 
        노동잠재력의 보유자로서의 여성의 단결.조직.교육운동을 통한 대규모의 
        적극적인 동원정책이 주조를 이루었다.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한 등소평 체제하의 여성정책은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는 점에서는 정책적 변화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개혁정치의 대전제가 
        되는 사회주의 민주를 추진하기 위한 법제화가 구체적인 면까지를 조정, 정돈, 
        개혁, 제고를 시도한 점에서, 보다 구체적이라는 특색을 지적할 수 있겠다. 즉 
        결혼의 자주, 일부일처, 남녀평등에 입각한 혼인법의 개정(1980), 혼인등기법의 
        개정(1986), 혼인.가정분규(이혼, 결혼, 담양:부모봉양 자녀양육)등에 관한 
        최고인민법원의 민사정책법률집행에 관한 견해와 사회와 가정이라는 이중적 
        역할부담에서 생기는 여성의 권익침해를 보장하기 위한 
        <여직공노동보호규정(1988.9)>, <재산계승법(1985.4)> 등의 법제의 보완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각주:유청파(1983), [중공의 혼인법] 
        (대북:상무인서관);양대문주편(1989), [혼인법학자학교정] 
        (북경:북경대학출판사) 참조). 

        1978년 이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 취임한 등소평은 실질적으로 당.정.군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1982년이지만 당의 정책내용은 그 이전부터 이미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4대 현대화 개혁방향으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등소평 
        체제하의 여성정책도 종래의 농업사회주의 노선에 의한 정책과는 동일할 수 
        없었다. 즉 경쟁과 압력(기술향상, 효육의 극대화 등)이 날라 가중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구체적인 당의 여성정책으로 채택되었다고 
        하겠다(각주:[중공중앙전발전국부련당조 "두회의 형편과 1981년 부련공작요점에 
        관한 보고"에 대한 통고](1981.5.16);중화전국부녀연합회 편(1983), ['사대'이래 
        부녀운동문선(1979~1983)] (북경:중국부녀출판사), pp.38~40).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아동과 청소년을 기르고 교육하는 일에 당의 여성 공작 중심을 둔다. 

        3억이상의 14세 이하 아동과 소년을 돌보는 일이 여성들이 해야 할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역할이다. 

        ②아동청소년을 낳고, 기르고, 교육하는데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청소년들이 연애.혼인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여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중앙당의 국책으로 정한 한가정 한자녀 낳기 위한 가족계획을 실천하도록 
        한다. 

        -아이들을 기르는데 필요한 탁아소.유아원.아동병원.오락장소와 놀이기구, 
        독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한다. 

        -가장은 자녀교육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와주도록 한다. 

        -여직공.여사원의 노동보호 복지문제를 연구하여 해결토록 한다. 

        ③공작방법은 과거의 우수한 방법을 계승하고 잘못된 것은 과감히 버리는 
        활발하고 적극적인 공작방식을 만들어낸다. 

        ④국내와 국제교류를 추진한다. 특별히 상층인사들은 대만과 홍콩의 
        여성동포들과 교류하도록 한다. 

        ⑤적극적으로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에 참여하도록 동원하고 조직을 통한 
        정치학습, 기술과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고, 중남경녀적인 봉건적 구습과 여성과 
        어린이를 무시하는 행위 및 범죄와 투쟁할 것이다. 

        이상으로 요약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1980년의 
        여성정책은 혁명후대의 육성을 위한 여성들의 노력과 참여이다. 여기에는 
        계획출산이라는 인구증가 억제책을 실행하도록 강요하는 정책이 더욱 구체화 
        되었고, 또 하나의 특색은 각 개인 각 집체단위 지역적 특성과 실제조건, 
        실현가능성을 토대로 4대 현대화 건설에 참여하도록 요구하였다. 따라서 
        1970년대의 혁명적 투쟁이 생산대열에 참여와 같은 여성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철인적 여성들을 출현시키는 정책노선은 아니라고 하겠다. 

        오히려 가족계획실천의 주도적 역할, 문명국가를 향한 정신적 풍요를 낳을 수 
        있도록 후대 신인들을 교육하는 일(각주:문명예술활동의 구체적 표현으로서의 
        오강사미삼열애(교양, 예의, 위생, 질서, 도덕은 중시하고, 마음, 언어, 행동,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것. 조국.사회주의.당을 사랑하는 것. 문화대혁명 이후 
        청소년 교육지침으로 제시된 것) 앞글, pp.177~18)이 각종 생산대역에의 무조건 
        참여열을 높이는 것보다 더욱 가치있다는 전통적인 보수사상이 바탕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혁, 개방이라는 중국사회구조 전반에 걸친 
        새로운 충격에 여성들이 어떻게 대응해가면서 그들의 활로를 모색하고 입장을 
        정립해가야 할까하는 것이 의문이다. 개혁과 개방이 중국의 앞길이라면 이것이 
        여성의 살길이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이론상으로는 여성이 활로로서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만 역사적 현실은 충돌과 좌절로 이어질 가능성은 더 커진 것은 아닐까. 
        자녀의 출산, 육아, 교육의 절대절명의 과제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큰 
        부담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사의 사회화의 
        한계를 인민공사생활을 통하여 경험한 중국의 경우 이제 남은 문제는 
        공업화의달성으로 인한 기계화가 가사노동의 양과 질을 조절해 주리라는 기대가 
        있을 뿐 후대의 출산.육아.교육의 부담은 축소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법률적으로 명시된 부모봉양의무(신혼인법 15조, 1982년 헌법 45조)등은 
        현대사회의 단혼가정적 경향 속에서는 여러가지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계획정책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정책은 아니지만 여성의 역할이 보다 
        중요하므로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1982년 헌법 제25조에 "국가는 출산계획을 추진하여야 한다. 인구증가는 
        경제사회발전계획과 상호적응하여야 한다"고 규정짓고 기본 국책으로 
        확정하였다. 이미 1980년 신혼인법은 "계획출산을 실행한다"(제2조)와 
        "부처쌍방은 모두 계획출산의 의무를 실행하여야 한다"(제12조)를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2천년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진국 수준으로 현대화의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12억에 달하는 인구의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절대적 판단에 입각한 
        국책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적인 남자가계계승관념.중남경녀적 사고의 
        바탕위에서는 여아의 살해, 아내의 박해 등을 억제시킬 수 있는 필요한 법률적 
        제제와 함께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선결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적 여건이 충실해지기를 기다릴 여유를 가질 수 없었던 중국은 
        도시 가정은 한자녀, 농촌은 두자녀, 변방 기타 소수민족은 형편에 따라 
        융통성을 인정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모든 민족에게 한자녀 낳기를 
        강요하면서 갖가지 배려, 즉, 현금보상금지급, 학교입학, 병원입퇴원의 배려, 
        직업배정, 주택배정권 우선부여, 은퇴후 노후지원연금에 보조금 등의 추가지원을 
        해 주었고 반대로 위반하는 가정은 벌금과 기타의 불이익을 상대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가족계획정책추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점은 후술할 것이지만 
        신정권의 여성정책의 일부로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책으로 평가될 것이다. 



        III. 여성계의 대응과 참여현황 

        1.중화전국부녀연합회의 활동 

        중국공산당은 당의 정책노선의 사업을 진행하고 선전하는데 각종의 
        군중조직단체를 동원하였다(각주:중국의 군중단체로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중국전국총공회,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중국전국부녀연합회, 
        중화전국청년연합회, 중화전국학생연합회,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중국홍십자회, 
        중국인민보위아동전국위원회, 중국인민구제총회, 중화전국귀국화교연합회, 
        중화전국대만동포연합회, 중화전국공상업연합회). 
        중화전국부녀연합회([전국부련]으로 약칭)는 중국공산당의 여성정책을 여성계에 
        전달하고 그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주역을 담당해오고 있는 당의 군중단체이다. 
        따라서 전국부련의 임무, 역할 및 기능은 당의 국가정책과 그와 관련되는 
        여성정책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전국부녀연합회(창립당시는 [중화전국민주부녀연합회])는 1949년 3월 전국 
        여성대표 500여명이 모여서 중국여성운동의 방향과 임무를 논의하는 대규모 
        부녀대회를 개최한 후(1949.3.24~4.3 북경)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중국공산당이 
        건국 직전 여성인력의 조직화의 필요에 의하여 추진된 
        것이었다(각주:중화인문공화국전국부녀연합회편(1957), [중국부녀 제3차 
        전국대표대회중요문헌](북경:중화인민공화국전국부녀연합회출판사), 
        pp70~77참조). 

        전국부련은 매4년마다 43차례 전국대회를 개최하였고, 1957년 3차 대회 
        이후로는 21년이 지나도록 그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채로 존재했었다. 그러던 중 
        1978년 9월 현대화 개혁을 위하여 일치단결을 호소하는 당정책에 따라 제4차 
        전국대회대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현대화를 위한 개혁.개방정책이 확정됨에 따라 전국부련은 3차례(1978, 1983, 
        1988)에 걸쳐 전국부녀대회를 열고 당책을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대응 
        방침을 논의하고 선전하고 실천방법을 모색하였다. 기본적으로 전국부련의 임무, 
        기능, 역할을 사회주의 현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여성을 동원하고 
        교육시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련이 2차에 걸쳐서 
        연합회회칙을 개정하였음을 주목해야겠다. 

        전국부련은 조직 후 10여년 후인 1957년 제3차 전국대회에서 최초로 회칙을 
        채택, 통과시켰다.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조직의 결집력을 강화하고 여성을 
        교육시켜 준법정신을 함양하여 민주인민정권확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사회주의 건설에 공헌하도록 한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21년이 지난 1978년 9월 4차대회에서 개정된 회칙에서 
        당과 군중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하는 군중조직으로서 금세기내에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4대 건설사업에 적극 동참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임무에서는 계급투쟁, 생산투쟁, 과학실험의 3대혁명을 추진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공업은 대경에서 배우고 농업은 대채에서 배우자"는 
        군중운동(각주:모택동이 문혁초기에 "공업은 대경유전의 방식을 모범으로 하라", 
        "농업은 대채대대의 방식을 모범으로 삼자"고 1964년에 한 자력갱생의 정신을 
        제창한 구호)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외 여성교육을 통한 
        준법활동, 가족계획, 자녀교육에의 관심확대, 간부육성, 대외적인 교류, 특별히 
        국제주의 교육을 통한 각국의 여성과의 우호적인 왕래 등 3차대회의 회칙내용 
        보다 발전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각주:중화전국부녀연합회 편(1978), [제4차 
        전국대표대회중요문헌](북경:인민출판사), pp.42~46). 

        그러나 총칙에서 밝히고 있는 4대 현대화에의 참여, 실사구시 정신, 모든 것을 
        실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원칙과 "대경.대채의 예외적인 비현실적인 생산투쟁을 
        전개한다"는 임무는 극히 모순된 것이었다. 

        10년이 지난 1988년 전국부련은 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부강.민주.문명의 
        사회주의 현대화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당의노선을 관철하기 위하여 많은 
        여성을 단결하고 교육하며, 여성의 합법적 권익을 보호하고 여성해방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전국부련의 기본적인 직능으로 밝히고 
        있다(각주:<중화전국부녀연합회장정>(1988.9.6), [중국부녀보](1988)(부인보간, 
        D423, [부녀조직과 활동] (1988, 5기),pp.25~26에서 재인용). 

        구체적으로 전국부련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①여성들이 개혁에 투신할 수 있도록 단결하고 동원하여 경제건설에 
        참여시킴으로써 사회발전을 촉진한다. 

        ②대다수 여성들을 자존.자신.자립.자강정신을 갖도록 교육하여 그들의 소질을 
        전면적으로 높여줌으로써 여성인재의 성장을 촉진한다. 

        ③여성의 합법적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성대표들로 하여금 민주적 관리와 
        민주적 감독문제를 협상하는 대화나 여성과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법규.조례를 제정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한다. 

        ④각계가 연합하고 여성과 여자어린이를 보호할 수 있는 적절한 일을 
        추진한다. 

        ⑤각계 여성의 단결과 세계 여성계와도 적극적인 이해와 우의를 증진하고 세계 
        평화를 보호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계급투쟁, 생산투쟁으로 표현된 계획초기의 기능으로서의 
        전국부련은 당책 추진에 한계가 있었음을 분명히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열린 중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의식변화와 실질적인 지식수준의 
        변화없이는 여성의 활로개척은 어렵다는 인식이 전국부련의 회칙개정을 
        불가피하게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성정책추진공작기구의 다양화와 수적팽창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표1>참조). 이것은 현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성정책수행이 
        전시대와 같은 이데올로기 학습.정치노선 선전을 통한 혁명적 열정을 고취시키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즉, 여성의 각성을 촉구하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조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판단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개혁정책 추진과정에 여성관련 출판물(<표2>참조) 자료가 입증해 
        줄 것이다. 

        <표1> 1988년 여성공작기구 (단위:개) 

        ------------------------------------------------------------------------- 
        소개단위 전국부련 성.자치구. 지(시.구.맹.주) 현(시.구.기) 합계 
        명칭 직할시 

        ------------------------------------------------------------------------- 
        부녀이론연구회 1 23 86 227 337 
        혼인가정연구회 1 13 22 117 153 
        가정교육연구회 - 38 87 1,339 1,464 
        합계 2 74 195 1,683 1,954 

        ------------------------------------------------------------------------- 
        출처:중화전국부녀연합회 부녀연구소.섬서성부녀연합회 연구실 편(1991), 
        [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북경:중국통계출판사), p.577 

        <표2>(각주:중국인민대학서보자료중심(북경)은 광대한 지역의 다양한 자료를 
        주제별로 분류하여 복사보간 자료를 발행한다. 1980년 후반에 접어들어 격월간의 
        [부녀조직여활동], (D423)이라는 영인자료가 출판되었다. 이 자료를 통하여 
        여성잡지나 신문 이외에 중국내에서 발표되는 여성관련 연구를 접할 수 
        있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명.부강 민주적 현대화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는 
        여성일꾼들은 단순한 생산력 증강이나 가사의 능률화.자녀양육의 절대적 
        노력이라는 당의 지도노선에 맹종하던 차원의 임무수행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6차대회에서 진모화주석은 당의 
        영도하에 독립자주적인 여성공작을 전개하는 것이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여성운동의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지도사상이라고([인민일보], 1988.9,21) 
        역설하였다. 

        <표2> 1988년 전국부녀보간 종류 및 발행량 

        ------------------------------------------------------------------------- 
        종류 신문 잡지 
        ---------------------------- ------------------------- 
        단위 종류수(종) 발행량(만부) 종류(종) 발행량(만부) 

        ------------------------------------------------------------------------- 
        국가급 1 32 3 1,136 
        성.자치구.직할시 4 441.5 26 10,376.05 
        지(시.구.맹.주) 5 270.1 3 163.3 
        현(시.구.기) 11 318 4 220 
        총계 21 1,061.6 36 11,895.35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50 

        즉, 군중단체들은 전체국민의 총체적 이익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보다 더 
        소속단체 자체의 이익을 위한 특수한 사업에 주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1983년 제5차 전국대회에서 확정한 아동과 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위한 여성의 역할을 가장 중심적인 과제로 삼았던 공작발향에서 
        후대의 건전한 육성이 여성들만의 의무나 역할이라기 보다는 국가나 사회 
        각계층의 관심과 협력이 어울어져서 성과룰 거둘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따라서 전국부련은 오히려 자녀양육이라는 어머니들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함으로써 여성과 여자아동의 권익증대를 보장하는 합법적 
        노력을 해야한다는 요구에 직면한 결과로서 6차대회에서 개정한 회측에 
        아동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겠다. 

        여성의 사회적 발전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회칙상으로 
        확정하였지만 4년이 지난 1992년에도 중국의 여성계는 전국부련의 활동이나 
        지도방침이 여성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적 
        견해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각주:서연(1992), "약론부련조직적 
        형상소조", [중국부녀] 2월호, pp.26~27). 개인의 이익이 국가 이익보다 
        우선순위가 낮은 것이 특징인 중국사회지만 의무의 충실한 이행이 권리보장과의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남녀가 평등한 
        민주사회.현대사회라는 이론이 실현된 것이라고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1978년 개혁.개방을 통한 현대화의 국책이 확정된 당시 제4차 
        전국대회에서 결의한 생산을 중심공작으로 채택하였던 전국부련의 임무가 1983년 
        5차회의에서는 아동과 청소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여성들이 사회주의 
        정신문명.물질문명발전에 충분한 능력을 발휘해 줄 것을 구체적으로 요구한 당의 
        노선을 지키기로 합의하였다. 그후 1988년의 6차회의에서는 여성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받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여성해방을 위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전국부련의 임무로 확정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전국부련의 임무나 기능을 각 시기마다 중국공산당 여성정책의 기본방향, 
        나아가서는 국가정책방향에 순응하면서 변화, 발전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개방.개혁의 확대와 정도의 심화가 가져다 주는 많은 충돌과 좌절, 회의에 
        빠져드는 여성들에게 합법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공식적인 기구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요구받고 있는 것이 전국부련의 앞으로의 과제이며, 조직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에 따라 그 성과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더욱이 
        건국후 30 여년 동안 계속되어온 물질적 기초와 경제능력의 확보가 전제될 때, 
        여성의 남녀평등권이 보장된다는 마르크스의 여성관과 계급투쟁의 승리를 통한 
        사회주의 공산국가가 성취될 때 자연해방도 함께 이룩된다는 모택동의 여성관을 
        바탕으로 하는 여성의 혁명적 과업수행 일변도의 여성정책 노선에 맹종하던 
        시기의 전국부련의 역할 수행단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2.여성의 개혁참여현황 

        중국공산당이 확정한 개혁.개방정책의 수행과정에 여성의 참여율을 분석한다는 
        일은 어찌 보면 불가능하다는 답이 정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여의 숫자적 
        통계자료를 정책수립의 참여나 집행과정에서의 실제적 역할과 연관지어 평가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실제적인 구조적 이해는 우선 참여율로나마 
        접근해야한다는 당위론에 바탕을 두어 일차적인 파악을 시도하고자 한다. 

        중국공산당은 건국 후로부터 4차('54. '75,'78, '82)에 걸친 헌법수정과정에서 
        남녀평등.여성의 정치지위향상과 여성간부배양을 국가의 입헌원칙의 하나로 
        확정하여 여성의 참여율을 높여가도록 하였다. 1954년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대표와 여상무위원은 각각 11.9% 및 5%였는데, 1988년에는 
        21.3%와 11.6%로 각각 증가되었다(<표3>참조). 전국정치협상회의 여위원 및 
        상무위원의 비율은 1954년 14.3%, 6.5%에서 1988년에는 13.6%, 9.7% 각각 
        중가되었다(<표4> 참조). 

        <표3> 역대 전국인민대회 여대표 및 여상무위원 (단위:명) 

        ------------------------------------------------------------------------- 
        참여수 여대표수 여대표비율 여상무위원수 여상위비율 
        기수(년도) 총수(%) 총수(%) 

        ------------------------------------------------------------------------- 
        1(1954) 174 12.0 4 5.0 
        2(1955) 150 12.2 5 6.3 
        3(1964) 542 17.8 20 17.4 
        4(1975) 653 22.6 42 25.1 
        5(1978) 742 21.2 33 21.0 
        6(1983) 632 21.2 14 9.0 
        7(1988) 634 21.3 16 11.6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571 

        <표4> 역대전국정치협상회의 여직원 및 여상무위원 (단위:명) 

        ------------------------------------------------------------------------- 
        참여수 여위원수 여위원비율 여상무위원 여상무 
        기수(년도) (%) 위원비율(%) 

        ------------------------------------------------------------------------- 
        1(1954) 12 6.6 4 6.9 
        2(1955) 83 14.3 5 6.5 
        3(1964) 87 8.1 8 5 
        4(1975) 76 6.3 9 5.6 
        5(1978) 289 14.5 24 7.6 
        6(1983) 285 12.5 33 11 
        7(1988) 284 13.6 32 9.7 

        ------------------------------------------------------------------------- 
        출처:[중국부녀 통계자료(1949~1989)] P.571 

        1988년을 기준하여 국가영도인은 4명, 국무원소속 각 부의 여성정.부 부장이 
        50년대 7명에서 13명으로, 여성 부성장이 2명에서 13명, 여성장은 1명, 
        여시장.주장.현장.향장 등 도시거민위원회의 총간부의 80%, 사법분야에서도 
        5,600명의 여성간부가 있다. 전체적으로 1951년 36만 6천명의 간부가 1988년에는 
        870만명으로 증가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각주:중화전국부녀연합회부녀연구소.섬서성부녀연합회연구실 편(1991), 
        PP.16~17). 

        중국공산당 여당원은 60-0여만명으로 14%정도를 형성하며 중앙위원회 여위원 
        정.후보 위원의 참여율은 4~10%전후로 증가되었다(<표5>참조). 

        <표5>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위원수 (단위:명) 

        ------------------------------------------------------------------------- 
        참여수 중앙위원수 여중앙위원 중앙후보 여후보위원 
        기수(년도) (%) 위원총수 (%) 

        ------------------------------------------------------------------------- 
        8(1956) 97 4(4.12) 73 4(5.5) 
        9(1969) 170 13(7.5) 109 10(9.2) 
        10(1973) 195 20(10.6) 124 21(16.9) 
        11(1977) 201 14(7.0) 132 24(18.2) 
        12(1982) 210 11(5.2) 138 13(9.4) 
        13(1987) 175 10(3.7) 110 12(10.9)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1991), p.572. 
        주:%는 필자분석 

        공산당 이외의 각 민주당파의 참여율도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다(<표6>참조). 
        특별히 공산주의 청년단의 참여율은 거의 40%를 육박하는 것으로 보아 
        청년세대에는 남녀 동등의식이 보다 발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표7-1, 
        2,3>참조). 

        <표6> 1989년 각민주당파여당원 여위원수 (단위:명) 

        ------------------------------------------------------------------------- 
        당원수 당원총수 여당원수 중앙위원수 여중앙위원수 
        당파이름 (%) (%) 

        ------------------------------------------------------------------------- 
        국민당혁명위원회 39,133 8,632(22.0) 237 42(17.7) 
        중국민주동맹 99,092 26,709(27.0) 299 39(13.0) 
        중국민주촉진회 46,061 17,610(38.2) 173 26(15.0) 
        중국농공민주당 44,813 7,879(17.6) 158 24(15.2) 
        중국치공당 10,223 4,061(39.7) 89 14(15.7) 
        구삼(93)학사 45,276 1,139(2.5) 201 27(13.4) 
        대만민주동맹연의회 1,160 407(35.1) 49 3(6.1) 
        중국민주건국회 50,946 9,421(18.5) 170 13(7.6)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572 
        주:참여율(%)필자작성. 

        <표7-1> 공산주의 청년단 여단원수 (단위:만명) 

        ------------------------------------------------------------------------- 
        단원수 단원총수 여단원수 참여율(%) 
        년도 

        ------------------------------------------------------------------------- 
        1975 4,550 1,768 38.86 
        1977 4,860 2,053 42.24 
        1978 4,854 1,948 40.13 
        1979 4,837 1,954 40.40 
        1980 4,774 1,947 40.78 
        1981 4,695 1,899 40.45 
        1982 4,660 1,882 40.39 
        1983 4,853 1,932 39.81 
        1984 4,973 1,985 39.92 
        1985 5,182 1,950 37.63 
        1986 5,636 2,913 38.91 
        1987 6,067 2,324 38.31 
        1988 5,796 2,183 37.66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575. 

        <표7-2> 공산주의 청년당여중앙위원 및 여후보중앙위원회 (단위:명) 

        ------------------------------------------------------------------------- 
        참여수 중앙위원총수 여위원수 중앙후보 후보여위원 
        기별(년도) (%) 위원총수 (%) 

        ------------------------------------------------------------------------- 
        6(1949) 95 2(2.1) 15 3(20.0) 
        7(1957) 143 12(8.4) 56 13(23.2) 
        8(1961) 149 25(16.8) 62 19(30.7) 
        9(1964) 178 29(16.3) 74 25(33.8) 
        10(1978) 201 44(21.9) 99 27(27.3) 
        11(1982) 263 66(25.1) 51 17(33.3) 
        12(1988) 165 22(13.3) 70 25(35.7)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575 

        <표7-3> 중국공산주의 청년단 전문간부중 여간부수 (단위:만명) 

        ------------------------------------------------------------------------- 
        간부수 공청단전직간부총수 여전진간부수 참여률(%) 
        년도 

        ------------------------------------------------------------------------- 
        1975 13.17 3.86 29.31 
        1977 13.54 4.39 32.42 
        1978 15.02 4.63 30.83 
        1979 16.16 4.84 29.95 
        1980 16.80 4.89 29.11 
        1981 18.47 5.11 27.67 
        1982 20.28 5.14 25.35 
        1983 20.61 5.09 24.70 
        1984 21.34 5.46 25.59 
        1985 22.05 5.78 26.21 
        1986 22.96 6.11 26.61 
        1987 22.53 5.85 25.97 
        1988 20.80 5.31 25.53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575 
        주:참여율(%)필자작성 

        또한 기층조직의 하나인 공회조직에 여성회원의 참여도는 상층조직의 참여도 
        보다 월등하게 많음을 알게 된다. <표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80년대 
        9년동안 직공인 총수 36.7%, 공회의 경우도 36.6%가 여성으로서 40%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8> 1980~1988 기층공회조직 및 여직공.여회원수 

        ------------------------------------------------------------------------- 
        위원 기층공회 직공수(만명) 공회회원수(만명) 
        년 위원회수 위원회수 ----------------------- ------------------------ 
        도 (개) 직공총수 여직공수(%) 회원총수 여직원수(%) 

        ------------------------------------------------------------------------- 
        1980 376,187 7,448.2 2,518.6(33.81) 6,116.5 - 
        1981 411,216 8,183.0 2,902.0(35.46) 6,843.9 2,412.8(35.25) 
        1982 433,651 8,586.6 3,065.9(35.71) 7,331.6 2,629.3(35.86) 
        1983 447,346 8,845.7 3,191.8(36.08) 7,693.4 2,771.4(36.02) 
        1984 466,509 9,243.9 3,370.3(36.46) 8,024.1 2,950.3(36.77) 
        1985 465,495 9,642.9 3,596.7(37.30) 8,525.8 3,149.2(36.94) 
        1986 502,230 9,949.6 3,664.3(36.83) 8,908.5 3,309.2(37.15) 
        1987 536,394 10,411.8 3,900.4(37.46) 9,336.6 3,486.9(37.35) 
        1988 54,114 10.474.0 4,434.9(42.34) 9.628.9 3,647.0(37.88)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574 
        주:참여율(%) 필자작성 

        과학분야에서도 발명상이나 과학기술진보상, 성화상 수상자도 여성이 15%를 
        차지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표9>, <표10> 참조) 

        경제건설분야의 여성참여는 1982년의 경우, 여성사회노동자는 19,510만명으로 
        전체의 43.6%이며 노동이 가능한 여성인구의 82%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1988년 
        말 노동 특히 여직공의 수는 5,036만명으로 1949년의 84배, 여직공의 전체직공 
        총수에 대한 비율은 1949년 7.5%에서 37.1%로 증가되었다(<표8>참조). 그러나 
        인구의 증가, 개혁과정에서의 제도적 변화와 효율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영방식 
        등으로 인해 1979년도 도시실업률이 5.4%로 증가하고 그 중 70%가 여성이라는 
        보고가 있다(각주:앞글, pp.6~7). 

        <표9> 1979~1989년 국가발명상획득 여성발명인수 (단위:명) 

        ------------------------------------------------------------------------- 
        획득인수 획득총인수 여성획득인수 점유율(%) 
        년도 

        ------------------------------------------------------------------------- 
        1979 116 9 7.8 
        1980 330 54 16.4 
        1981 372 31 8.3 
        1982 741 70 9.5 
        1983 939 138 14.7 
        1984 1,150 92 8.0 
        1985 836 78 9.3 
        1986 89 9 10.1 
        1987 780 118 15.1 
        1988 729 106 14.5 
        1989 445 68 15.3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560 
        주:참여율(%) 필자작성. 

        <표10> 국가과학기술진보상.자연과학상.성화상수상자수 (단위:명) 

        ------------------------------------------------------------------------- 
        종류 과학기술진보상 자연과학상 국가성화상 
        ------------------- -------------------- ----------------- 
        년도 총수 여(%) 총수 여(%) 총수 여(%) 

        ------------------------------------------------------------------------- 
        1982 - - 609 - - - 
        1985 3,869 532(13.7) - - - - 
        1987 2,874 542(18.9) 936 140(15.0) - - 
        1988 2,746 392(14.3) - - 629 - 
        1989 1,266 196(15.5) - - 575 35(6.1)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560 
        주:참여율(%) 필자작성 

        농업생산참여 역시 50년대 초에는 농촌여성 60%정도가 참여하였으나 자급자족 
        경제의 전업화, 상품생산력의 발달, 부업의 다양화로 여성이 중심이 되는 가구는 
        3분의 1에 해당하며, 어업, 목축, 수리 노동자의 47%가 여자라고 한다. 

        과거 10년사이 제3산업의 직공은 988만명으로 83.7%의 중가율을 보인다. 
        국영기업체와 경공업의 직공의 남녀비율은 1980년은 43.7:56.3, 1988년은 
        47.7:52.3로 여성이 반수이상을 차지하였다. 1987년 인구 1%추?조사에 의하면 
        경제인구는 여성이 1982년 38.9%, 87년은 50.8%였고, 교원은 각각 39.0%, 
        44.1%를 각각 여성이 차질하였으며, 장정조직책임자는 82년에 15.2%, 87년에는 
        17.1%가 여성이었다. 기업체장은 여성의 수가 82년 8.9%에서 87년 11.1%로 
        증가하였다는 통계로 보아 전중국의 여성참여율을 일반화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고위직 간부의 참여율은 10~20%(각주:[인민일보], 1990년 8월 18일자. 
        여성간부 965만명, 1951년 대비 64배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북경시의 경우 
        처.국급 여성간부는 14.1%라고 보도하고 있다)를, 농업생산에서는 40~50%이상의 
        참여율이 증가되었음을 알 수있다. 공장공업, 직공의 경우는 35~40%의 증가율을, 
        교육수준의 향상율은 40%쯤으로 높아졌다. 고등교육혜택율 특히 해외유학생은 
        1976~1987년까지 32,364명중 여성이 561명 17.2%인데 이것은 고급간부, 고위직 
        20%이내와 거의 맞물리는 추세이다. 따라서 건국 30년 동안의 참여율에 비하면 
        각분야에 월등한 참여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교육계의 참여율에서도 보통 고등학교 전임교사는 1988년의 경우 28.2%이며, 
        30세이하의 교직전임교사가 34.0%라는 숫자는 여성의 교육수혜정도가 
        상승하였음을 알게 된다(<표11>참조). 대학원 수준에서는 역시 5~10%정도의 
        여지도교사가 있을 뿐이다(<표12>참조). 이것은 고위급에 올라갈 수록 여성의 
        참여율이 낮은 것과 같은 현상이다. 

        <표11> 1988년 보통고등학교 여전임교사 연령사항 (단위:명) 
        ------------------------------------------------------------------------ 
        교사수 전임교사 여전임교사 점유율(%) 
        연령 
        ------------------------------------------------------------------------ 
        총계 393,185 111,042 28.24 
        30세이하 137,852 46,876 34.00 
        31~35세 47,964 14,055 29.30 
        36~50세 24,768 6,675 26.95 
        41~45세 32,358 9,737 30.09 
        46~50세 50,437 14,012 27.78 
        51~55세 62,337 15,254 24.47 
        56~60세 28,315 3,490 12.33 
        60세이상 9,154 943 10.30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9~1989)], p.181. 

        <표12>1985년 각종연구소 여자지도교사수 및 비중 (단위:명) 
        ------------------------------------------------------------------------ 
        박사학위 여 점유율 석사학위 여 점유율 연구생반 여 점유율 
        지도교사 % 지도교사 % 지도교사 % 
        ------------------------------------------------------------------------ 
        총계 1,524 51 3.35 33,448 2,756 8.24 983 49 4.98 
        보통고등학교 1,174 42 3.58 27,146 2,301 8.48 972 49 5.04 
        과학연구기구 350 9 2.57 6,302 455 7.22 11 - - 
        ------------------------------------------------------------------------ 
        출처:[중국부녀통계자료(1948~1989)], p.180. 

        더욱이 건국전(1946) 보통학교수가 207개에서 1988년에는 1,025개, 학생수는 
        2만 9천명에서 68만 9천명으로 24배가 증가한 것이라든지, 1981년 
        <중화인민공화국학위조례> 시행이후 1988년까지 여성박사학위소지자가 304명, 
        석사는 1만 4183명으로 60년대에 비해 18배로 증가된 것을 볼 때 여성듸 
        고등교육참여율은 극히 낮은 편이라고 하겠다(각주:앞글, p.116). 그에 비하면 
        보통고등학교 여교사 수는 1950년 11.0%에서 28.2%로 1988년에 거의 3배가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각주:앞글, [보통고등학교여교사 및 비중](1950~1988), 
        p.174). 

        전반적으로 개혁정책 추진과정에서 여성의 사회노동자로서 적극적인 
        참여현상이 두드러지게 확대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IV. 개혁과정중에 나타난 여성문제 

        1988년 1월호 [중국부녀] 잡지에 "여성의 나아갈 길"이라는 년중 기획물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개혁 10년동안 경험한 여성문제에 관한 많은 논의가 
        시작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를 중심으로 한 연구를 바탕으로 여성문제의 
        실상의 일부나마 파악해보고자 한다. 

        1978년 이후의 중국의 개혁정책은 경제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회생산력 
        발전이 중심이었지만 정치사회적 변화도 부분적으로 병행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사회는 정치사상적으로는 교조주의와 관료주의 , 경제적으로는 평균주의 
        원칙에 입각한 종신고용제와 분배원칙이 적용되어 개인적으로는 의뢰심과 타성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한 충돌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자신의 열등한 여건 즉, 생리적 제약, 출산, 가사부담, 남성보다 낮은 
        지적 수준 등으로 냉혹한 경쟁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 것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한 채 생산대열에의 참여를 호소하는데 호응했을 뿐이다. 그러나 
        참여가 가속화되면서부터 남녀평등이라는 법적.제도적 보장과 남성동지가 할 수 
        있으면 여성동지도 할 수있다는 이데올로기적 이상과 실제와의 괴리를 체험하게 
        된다. 즉, 각종 민주선거에서의 여성간부가 낙선함으로써 실감한 여성참정문제의 
        돌출, 기업에서 독자적 경영권이 허용됨으로써 기업이 부담해야하는 
        여성노동자의 복지문제(출산유급휴가, 수유아동을 위한 시설, 시간배려 등)로 
        인한 여성고용기피와 그 결과 실업률의 상승 등이다. 60년대 초반의 여성문제는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현상의 재연.재등장의 문제, 여자대학생의 입학정원 제한, 
        졸업후 직업분배상의 불이익,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불공정한 실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는 산업화 초기에 나타나는 노동력의 과잉과 노동강도의 변화로 인한 
        문제이며 현상으로서 어찌보면 중국사회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여성해방을 보장한다는 계급투쟁적 관념에서 노동여성과 여성노동문제에 
        여성문제를 한정한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여성문제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입장이 확립되기를 희망하는 본질적인 
        여성문제에 대한 이론적 합의가 성립될 수 없다는 데서 봉착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국.전백성을 복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개혁개방정책이 왜 
        이같은 여성문제를 발생시켰는가, 개혁정책이 여성문제를 돌출시켰다는 논의는 
        왜 생기는가를 파악해야 하리라고 본다. 

        첫째로 중국사회 자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중국여성의 해방은 
        사회주의제도와 입법수단을 통과하여야만 실현된다는 인식이다. 다함께 부유하고 
        다함께 가난해야한다는 농업위주사회주의 정책하의 인민공사체제에 익숙하였던 
        중국사회에서는 개인의 주체적 요소는 논외였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문제, 
        여성의 이중역할로 인한 고통.부담과 여성능력 향성을 위한 교육기회 부여는 
        물론 덮어둘 수밖에 없었다. 다만, 개혁으로 인한 물질적 수준의 상승과 더불어 
        나타나게 되었던 불가피한 현상일 뿐이다. 둘째로 중국여성 자신의 수준이 
        열세라는 사실이다. 1980년대 말 현재 인구의 15.9%가 문맹이며 문맹의 70%가 
        여성이라는 점만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개혁의 초급 단계에서 각 부문의 
        경제효율을 중심적인 원칙으로 하였을 때 약한 자가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냉혹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개혁은 여성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볼 대 불리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여성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분석과 활로를 모색할 필요를 인식한 중국여성계는 사회개혁의 선진화, 
        현대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여성들에게 4자운동(자중, 자강, 자존, 자신)을 
        구호로 내세우는 한편으로 활발한 이론과 실제의 분석적 연구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여성문제의 실상과 해결방안을 토론해왔던 것이다. 

        1.여성은 가정으로 돌아가야한다(각주:장연(1988), "대구장 부녀회가적 사색", 
        [중국부녀] 1월호 pp.8~10, [중국부녀]에는 1988년도 전회에 걸쳐서 이문제에 
        대해 계속 논의된 글들이 발표되었다). 
        -천진 대구장여성의 가정으로 돌아간 것을 생각함- 

        개혁전 95%이상 생산노동에 참가하였던 작은 마을 대구장에서 노동력이 있는 
        45세 이하 여성 525명중 80명, 즉 16%만이 사회노동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순수한 가정주부로서 가사에 전념키로 결정한 사실을 둘러싸고 여성들의 
        가정주부역할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견해와 이를 반대하는 논쟁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개혁전 대구장의 가정형편이 여성의 노동수입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사의 사회화(인민공사)와 농업생산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여성들이 가정주부역할만 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지만 공업화로 인한 생산구조의 
        변화와 농업, 임업, 목축, 어업, 공업, 상업 및 부업으로 마을전체가 
        경제연합체로서 발전된 경제구조로의 변화는 여성이 이중적 고통을 부담하지 
        않고도 지역사회의 부유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지역에서는 일한만큼 대우한다는 원칙에서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오히려 여성에 대해 배려하여 한 자녀에 대한 양육비로 여아는 30원, 
        남아는 20원이 지불되는 것을 보아도 남녀의 불공평한 상황은 없음을 알게 된다. 

        '대구장여성의 가정으로의 복구'사실은 기업의 입장에서는 환영해 마지 
        않았다. 기업들은 사회안정과 기업발전을 위하여 남성에게 전적으로 취업의 
        기회를 줄 수 있다면 경제적 효율의 상승, 남성실업율의 감소, 여성근로자로 
        인한 비생산적 비용부담 감소라는 측면에서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여성들로부터는 가사노동과 생산노동이라는 이중부담에서 겪는 압력과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으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물질적 
        생활수준의 향상이 여성의 자기 실현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사회생산면에서 여성인력의 가정회귀는 불가능하다는 논의가 맞서면서 
        여성자신의 본직적 문제와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2.취업상의 문제 

        1988년까지 여성의 노동참여율은 37.1%로 상승하였지만 생산구조, 경영방법의 
        변화, 시장경제의 발달로 오히려 실업율이 높아가는 현상이다. 

        1988년 전국총공회여공위원회의 조사(각주:전국총공회여공공작위원회(1988), 
        "도시여성취업면에 직면한 새로운 문제점에 관한 조사보고", [공윤연구], 
        pp.21~25. (D423, 부녀조직과 활동, 1988년 2월 pp.45~47) [중국부녀], 1988년 
        3월 4일자 1면)에 의하면 전국 11개의 성.시의 660개 기업(기계야금, 석유화공, 
        수리전력, 교통운수, 금융보험, 상업, 방직, 우편체신, 전자)중 실직된 직공 
        27만명중 64%ㄹ가 여성이고, 현재 과잉직공(장차 해고대상 직공)의 62.5%가 
        여성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 기업이 여공모집을 꺼린다. 

        660개 기업중 동일한 능력이라도 30.4%는 남자를, 5.3%는 여자를, 64.3%는 
        남녀동등하게 모집하겠다고 답하였으나 실제는 남녀의 차별을 두고 남자를 
        선호한다. 그 방법으로는 대개 3가지가 있다. ①모집 당시 남녀의 합격선을 
        달리한다. 예컨대 66개 금융기업이 남자는 154점, 여자는 167점의 합격선을 
        두어서 남자직공을 유리하게 한다. ②여자대학생, 여중졸업생의 취업은 
        고용단위로부터 1/3은 거절당한다. 가령 1987년 북경시 고교졸업생 34.6%의 
        여학생 중 53.3%가 거절당하였고, 중국정법대학 여자졸업생을 보면 전원 취업이 
        거절되었고, 상당수의 기업은 여성모집을 하지 않았다. ③계약고용제로 인해 
        여성이 실업위기를 맞고 있다. 17~22세에 취업할 경우 5년계약제를 하는데, 
        만기가 되면 출산기에 해당하므로 재계약이 어려운 현실이다. 

        둘째, 개혁이전의 체제, 정책, 제도에 원인이 있다. 기업의 자율성, 자주권이 
        없는 상태로 평균주의 원칙에 의한 노동력 배치의 불합리, 개혁정책이 
        농업위주의 산업구조를 중공업, 기술방면으로 확대함에 따른 여직공의 능력의 
        한계는 경제효율 우선의 경영구조변화과정에서 여성의 실업.취업난은 불가피한 
        현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방면에서의 배려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대안으로 나오고 있다(각주:등미(1988), "현단계 여성문제 및 
        해결방법", [호남당교학보(장사)], pp.23~26, (D423, [부녀조직과 활동], 1988, 
        4. pp.43~46). 여성의 취업은 중공업분야에서 열악함이 실업의 원인이기도 
        하다(표참조). 

        여성이 취업에 유리한 제도를 만든다. 

        -여성직공이 많은 기업에게는 국가가 세금우대 혜택을 허용한다. 

        -생양기금을 설립한다. 여직공이 아이낳고 기르는데 필요한 산전산후휴가, 
        수유시간, 임신중의 휴식공간 제공 등으로 인한 비효율적 생산비 부담을 
        특별기금을 마련하여 기업부담을 줄이도록 해준다. 

        -남녀 양편의 소속기업들의 상호보상, 부담제, 여직공 생육비 - 입원비, 
        의약비, 독생자녀 양육비 등 - 를 남자근무처가 부담하도록 한다. 

        -여성에게 적합한 직업을 발전시킨다. 상업, 음식업, 관광업, 
        가사관리(파출부)의 직업화 등으로 여성이 경쟁압력을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경제적 수입을 보장받도록 한다. 

        -취업시간을 단축한다. 시간제, 반나절, 격일제 근무 등의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한다. 

        여성자신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강.자립.자신.자중교육을 통한 실력배양과 함께 전통적인 의뢰심, 열등감을 
        탈피하려는 강한 의지와 경쟁관념에 투철한 싸움이 없이 취업난을 극복할 수 
        없다는 인식의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3.참정문제 

        여성간부가 965만여명으로 1951년에 비하면 64배 늘어난 
        것이라는(각주:[중국부녀](1984), 9월호는 성시대남대녀 혼인특집호를 
        발행하였다. 북경시의 경우 30~39세 미혼청년 중 남자 2만, 여자 3~4만명으로 
        여성이 월등하게 수가 많았다. 대부분 여성이 학력이 높다. 혼인적령기를 놓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로 분석되나 살집(방)을 분배받기가 어렵다는 현실적 문제, 
        지식 수준의 불균형, 직업에 대한 편견, 강렬한 자기실현 욕구, 신체적 제약으로 
        분류된다. 미혼청년의 증가현상은 이후에도 계속 사회적 문제로 논의되었다) 
        보도가 있지만 당.정 및 기업체 고급학교 수준의 정치적 고위직 관료의 
        여성비율은 20%가 안되는 상태이다. 37.1%의 여성취업율이 이루어진 
        개혁개방사회에서 여성의 참정.의정의 고위직 참여율이 상승되기를 기대한다. 
        더욱이 현재의 고위간부가 모두 노령이라는 사실은 주목해야할 문제이다. 

        4.가정관계의 문제 

        혼인의 자유보장과 남녀평등을 보장한 <혼인법>(1980), <혼인등기법>의 
        개정(1986)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혼인지참금, 매매혼, 인신매매, 남첩.매음문제 
        등 부부관계의 비정상적인 문제로 이혼율이 상승한다는 보고도 여성문제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가족계획의 한자녀 낳기의 국책은 여아살해와 
        남아선호경향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더불어서 개혁개방정책의 열기로 만혼만육이 장려됨에 따라 노총각, 노처녀의 
        혼인문제도 하나의 사회문제로 여겨진다. 

        5.교육문제 

        1982년 개정된 <헌법> 제19조에 전국민 참된 교육 의무화를 규정하였지만 
        아직도 문맹대국이고 그 문맹의 70%가 여성인 현실이다. 고도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개혁이라는 목표와는 거리가 먼 상태에서 어떻게 여성들의 교육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가는 어찌보면 개혁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여성문제이다. 
        교육 문제가 해결된다면 앞서 지적한 문제의 대부분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는 어린 소녀들이 취업전선에 나가기 
        위하여 학교를 그만두는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보고(각주:형화91990), 
        "여성인력자원을 합리적으로 개발하자", [중국노동보] 3월 3일(D423, 1990.2. 
        pp.46~48), 주초주(1990) (주28) 참조)다. 이것은 기업의 자주권 부여, 사기업을 
        인정하는 상업경제구조로의 변화가 가져오는 인력수급과 관련된다. 물질이 
        교육보다 더 가치롭다는 현실적 판단에 의한 학업중단인 것이다. 

        6.여성문제 

        여성문제에 대한 이론적 연구가 뒷받침된 여성조직의 개혁의 필요가 절실하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성정책의 공식적 추진기구인 전국부련의 조직개편은 
        여성문제 전반에 걸친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단순히 당책의 전달고 수행기능만으로는 확대되는 여성의 
        사회생산참여와 의식의 향상을 수용하고 선진적 단계로 여성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데 고민이 있다. 

        예컨대 가족계획에 따른 여성과 아동의 합법적 보호, 여성실업율의 증가로 
        인한 현실적인 취업난 해결, 각종 선거에서의 여성당선율 확대, 각종 
        사회제도상의 여성 불이익의 해소 등 산적한 현실적인 문제를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해결해 줄 수 있는 정책적 입안이 가능할 수 있도록 기구개편이 절실한 
        문제다. 단순한 기구개편이 아니라 전국부련 관계자들 자신의 인식전환이 바탕을 
        이룬 위에 전 여성 모두의 이해와 협조 아래에서만 실천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결국 앞에서 지적한 개혁과정에서 나타난 여성문제들은 모두 사회문제로서 
        여성 자신들만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사회구성원 남녀 모두의 공통된 고민이며, 해결의 주체들인 것이다. 경제적 
        발전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을 오랜 동안의 갈등과 충돌, 좌절을 겪으면서 
        해소되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 삶의 실태에서 비롯된 
        문제들인 것이다. 



        V. 전망 

        필자는 현대화란 국가의 권력기구, 경제구조, 사회관계, 인간평등을 
        기본원리로 하는 개인적 주체성의 합리화를 위한 선진적 역사운동이라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현대화가 중국의 개혁.개방 10여년의 성과에서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개혁추진과정에서 상당부분이 시도되고 큰 변화를 이룬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종래의 출산과 가사관리에 
        전념해오던 여성의 역할에 사회생산에 참여하는 국가경제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개혁정책 추진과정에서의 국가적 의무이행요구는 현대중국 여성생활에 큰 
        충격이었다. 건국이후 법적.제도적 측면에서의 남녀평등의 원칙이 인정됨에 따른 
        사회생산 참여의 경험을 가졌던 중국여성들이었지만, 산업화, 공업화를 
        추진하려는 4대 현대화 개혁정책은 절대다수의 여성들을 산업전선대열로 이끌어 
        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관계의 선진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중국 여성의 책임은 가정인으로서의 아내.어머니와 함께 
        취업이라는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을 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현대중국 
        여성의 정서생활에도 모성애와 성애로서 만족해오던 차원을 넘어서 
        자기실현욕구와 자애의 의미를 크게 의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경제적 효율의 
        극대화가 요구되는 냉혹한 현실의 경쟁 속에서 살 길을 찾으려는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험하게 되는 좌절과 패배감을 극복해내는 일이 여성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제 중국사회는 법적.제도적 측면의 원론적 남녀평등 원칙으로부터 보다 더 
        구체적인 미시적 여성정책을 수립하여 경제적 효율을 높이는 산업화의 단계를 
        넘어서는 정책상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문맹대국의 중국여성들의 
        분투노력은 올바른 방향으로 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교육을 통한 여성 자신들의 끊임없는 자기능력 향상 노력과 
        세계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균형있는 감각을 가진 미래지향적인 
        여성지도자들의 전략이 함께 한다면 자원과 인력이 풍부한 중국사회에서 여성은 
        굳건하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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