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그 다름과 힘
        저자 양현미
        발간호 제046호 통권제목 1995년 봄호
        구분 ARTICLE 등록일 2010-01-27

        I. 카탈로그 겸 책이 갖는 이중성. 
        우선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이해를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원래 동명의 
        전시회를 소개하기 위한 카탈로그로서 기획된 것이었다. 미술계에서 카탈로그는 
        전시회라는 일회적인 성격을 갖는 행사를 홍보하고 기록하기 위한 매체이다. 대개 
        평론가나 작가가 쓴 서문과 전시회에 출품된 대표적인 작품사진들, 작가의 약력 
        등이 카탈로그의 주요한 구성요소이며 카탈로그에 실려 있는 글과 작품사진들은 
        전시회라는 텍스트와 그것의 미술사적 맥락을 환기시키기 위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전시회가 일회적 성격을 갖기 때문에 작가는 전시회 만큼이나 카탈로그에 많은 
        공을 들인다. 서울에서는 일주일에만도 수십회의 전시가 열린다. 그에 따라 
        제작되는 카탈로그 우편물로 꽉찬다. 하루에도 십여개씩 쌓이는 카탈로그를 
        하나하나 세심히 살펴본다는 것은 의당 그러해야 할 그들의 직업상의 윤리임에도 
        불구하고 실은 거의 현실성이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소통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카탈로그는 화려하고 과시적임에 비해 매우 일회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카탈로그가 갖는 본래의 '소통매체'로서의 기능을 강조하고자 기획자는 
        카탈로그에 책의 성격을 결합하였다. 기획자인 평론가 김홍희씨는 "카탈로그는 
        전시회 자체가 보여주지 못하는 비가시적인 사항들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기록으로 남긴다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전시회가 끝나고 
        동시에 카탈로그의 역할도 끝나버린다... 카탈로그를 기록 이상의 페미니즘에 
        대한 소개책자로 만들기 위하여, 단행본으로 발행하기로 결정"(p.27) 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는 동명의 전시회 도록으로서 
        미술관 대표의 인사말, 기획자의 전시회 서문, 참여작가 19인의 작품사진과 글, 
        아마추어인 한국 미술관 여성회원 10인의 작품사진이 실려 있다. 후반부는 
        페미니즘에 관한 여러 분야의 논문 8편이 실려 있다. 말하자면 전반부는 
        카탈로그이고 후반부는 논문집이다. 원래 카탈로그는 전시회 개막 전에 평론가나 
        지인들에게 우편배달되거나, 전시회장에서 배포되어서 나중에 따로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단행본으로 출판됨으로써 두가지 효과를 얻고 
        있는데, 페미니즘 미술에 관심있는 독자들과 늘 만날 수 있는 통로를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볼 때마다 과거의 전시회를 현재의 담론 속에서 매번 되새기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카탈로그-책은 이중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생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으로 정리가 잘 된 치밀함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활력과 추상적-이론적인 긴장감을 이 책에서 어느 정도나 
        실현시키고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자. 

        II. "여성, 그 다름과 힘"이라는 제목에 관하여 
        최근 미술계에는 이런 종합적인 성격의 페미니즘 미술적이 두어 차례 열렸다. 
        1991년 평론가 김영순씨가 기획한 [한국 여성 미술과 그 변속의 양상, 여성의 
        표현, 표현 속의 여성성]전(한원 갤러리). 1992년 평론가 이영철씨가 기획한 
        [여성, 비어있는 풍경]전이 기억난다. 이 두 전시는 대체로 미술사적이거나 
        시적인 제목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여성, 그 다름과 힘'만큼 선언적이거나 
        저돌적인 인상은 주지 않는다. 반면 '여성, 그 다름과 힘'은 거대한 외침, 
        집단적인 주장, 분연히 떨치고 일어섬 같은 전투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한 
        전투적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다름'에서 나온다. 여성으로서 남성과 
        다르다는 점으로부터. 그렇다면 남성과 다른 여성적인 특성, 즉 여성성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으로 규정되든 이 물음은 여성성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따로 규정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렇게 실마리를 풀고 나면 우리는 '여성, 그 다름과 힘'이 어떠한 패러다임 
        하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구 페미니즘 미술사를 되돌아 보건대, 
        그것은 70년대에 모더니즘의 패러다임 하에서 이루어진 페미니즘 미술, 즉 
        행동주의, 분리주의, 본질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1세대 페미니즘 미술의 입장과 
        동일하다. 이 전시의 제목은 작가와 기획자가 1세대 페미니즘 미술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책 전체를 찬찬히 훑어나가다 보면 이 전시의 작가나 기획자가 
        사실은 전적으로 1세대 페미니즘 미술관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김홍희씨는 서구 페미니즘 미술사를 개관하는 자리에서 현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이며 이제 1세대 페미니즘이 기초하고 있던 모더니즘적 
        패러다임은 깨졌다, 그것은 깨져 마땅했다는 논지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들의 작품들 중에서도 포스트모던적인 특성을 보이는 것들이 몇 점 눈에 
        띈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패러다임과 그것을 깨려는 포스트모던적 해체의 장력 
        사이에서 우리는 이 전시의 전체 성격을 어느 쪽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판단을 위해서 제일 필요한 일은 이 전시회에 묶인 작가들, 또는 작가들의 
        작품들과 이 전시회를 엮은 기회가이자 평론가인 김홍희씨의 글을 분리해서 보는 
        일이다. 

        III. 여성적인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 
        전시 서문에서 맨처음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부제인 '여성적인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이다. 여성주의 미술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만 '여성적인 
        미술'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이 지시(refer)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 
        대상을 규정하는 '여성적인'이란 어떤 속성인가? 김홍희씨는 여성적인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여성적인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은 모두가 미술이 남성적인 창조행위로 
        대변되는 성차별의 문화 속에서의 여성미술이라는, 여성미술의 기본적인 
        딜레마로부터 대두되는 문제지만, 여성주의 미술이 의식적인 차원에서 여성성을 
        강조하고 여성문제를 이슈화하는 반면에, 여성적인 미술은 여성적 감수성을 
        본연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표출할 뿐이다." (p.9) 

        여성적인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은 그것이 작가의 의식적 행위냐 무의식적 
        행위냐에 달려 있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은 
        여성주의를 부르짖지는 않되, 작업으로 성에 대한 인식을 표명하며 여성으로 
        그린다는 실존적 행위를 통해 광의의 페미니즘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여성적인 미술에 대한 정의는 '성에 대한 인식 표명,' '여성으로 
        그린다'는데 무게중심이 있는데, 이러한 개념이 어떤 대상을 분류할 수 있게 하는 
        구별적인 범주로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이 여성적인 미술이라는 개념은 
        김홍희씨의 여성주의 미술 분류에서 본질주의 미술에 대한 정의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홍희씨 스스로 "내면적인 여성성에 관계되는 작품일 경우, 
        그것이 본질주의적인 페미니스트 작업인지 여성성을 표출하는 여성적인 
        작업인지에 대한 구분이 외양적으로는 불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구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성을 끌어들임으로써 구분을 할 수 있다. 본질주의적 페미니즘이 1970년대 
        미국 서부지역에서 일어난 지역적, 시대적 중심 또는 한계를 갖는 것인데 반해, 
        여성적 미술을 미술사적으로 이용가능한 분석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페미니즘 미술이 생기기 이전의 미술에 대해 '여성적인 미술'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읽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여성적 미술'을 역사적으로 다시 읽어내는 데에는 두가지 일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첫째는 미술사에서 여성화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미술사상에서 사라지게 한 
        심층적인 억압구조를 표명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또는 예술사회학적인 이러한 
        끌어올임으로부터 여성화가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린다 
        노클린이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는가'에서 시도한 것이다. 

        둘째는 화가의 성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에 대한 규정에 입각하여 
        과거의 미술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성'에 대한 규정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70년대에 살았다면, 즉 모더니즘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의심없이 여성성이 어떤 본질적인 규정이 가능한 감수성이라고 
        볼 수 있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그동안 딛고 있었던 패러다임이 해체되고 붕괴되는 시대이다. 그것은 내적 
        필연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적 충격에 의해 다가온 시대이다. 모더니즘 
        프로젝트의 유효성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이 강력한 문화적 파급력을 갖고 들어오면서 극도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여성성'에 대한 개념 규정이나 '여성적인 
        미술'이라는 개념은 현재로는 불투명한 개념이며 오히려 해체를 통해 
        재구축되어야 할 시대적 과제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김홍희씨가 여성적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을 구분하면서 제시한 
        '여성적인 미술'의 개념을 잡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방법은 글에서 '여성적 미술'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다른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성적인 미술은 내적 구분근거를 가진 것이라기 보다는 
        '외적인 필요'의 소산인 것으로 보인다. 

        "페미니즘을 내건 미술 전에 여성주의라기 보다는 여성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포함시킨 동기부터 이야기 해야겠다. 우선은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이 
        아직 다양하지 못하고 본격적인 페미니스트라고 불리울 수 있는 작가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여성미술의 다름과 그 힘을 보여주자는 것이 이 전시회의 
        취지인 이상, 몇 안되는 페미니스트들의 작품만으로는 그러한 목적을 충당시킬 
        수가 없었던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p.11) 

        이러한 성향은 여성주의 미술의 논쟁적인 두가지 흐름을 통합하여 살펴보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여성주의 미술은 미술계에서 이루어지는 여성화가에 대한 
        차별구조를 사회적으로 비판하는 행동주의 페미니즘 미술과 왜곡되지 않은 여성의 
        본래적인 감수성, 여성성을 추구하는 본질주의 페미니즘 미술로 크게 대별된다. 
        전자가 미국 동부에서 먼저 발생했고, 나중에 후자가 미국 서부에서 나타나 각기 
        지역적 독특한 색채를 띠고 전개되어 나갔다. 양자는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개념, 
        전략 전술 등의 차이로 인해 논쟁을 많이 벌였었다. 하지만 지금 이 양 경향을 
        바라보는 전시 기획자의 견해는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통합적, 화해적이다. 

        "사실 이 전시회의 숨은 의도가 있다면, 그것은 한국미술이 극복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인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페미니즘이야말로 양진영을 화합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전략 중의 하나인 
        것이다" (p.26) 

        IV. 서구 여성주의 미술을 보는 시각. 
        서구의 페미니즘 미술은 1세대의 행동주의적 페미니즘과 본질주의적 페미니즘, 
        2세대의 기호학, 해체주의, 정신분석학을 수용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큰 틀을 전제하면서 저자는 이를 행동주의 미술운동, 여성주의 
        미술의 개념들, 여성주의 미술의 이슈들, 페미니즘의 개진-해체주의 이론과 
        정신분석학의 수용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행동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절에서는 70년대 미국 동부에서 활동한 1세대 
        행동주의 미술운동과 2세대 행동주의 미술운동을 정리하면서 당시의 여성주의 
        단체의 활동,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린다 노클린, 해리스), 평론가(루시 
        리파드)들의 이론 및 전시기획 작업([여성 화가들], 1976)을 정리하고, 당시 
        생겨났던 여성만을 위한 대안적인 문화공간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 절에는 미국 
        서부의 페미니스트 미술, 즉 본질주의적 페미니즘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적절한 절의 구분이 가해져 있지는 않다. 그 다음으로 당시의 주요 
        여성미술잡지가 소개되어 있으며, 유럽, 그 중에서도 가장 선도적이었던 영국의 
        페미니즘 미술 활동을 정리하고 있다. 

        여성주의 미술의 개념들에서는 수정주의, 분리주의, 본질주의라는 항목 속에 
        이즘별로 1세대 여성주의 미술을 분류하고 있는데, 수정주의는 1세대 
        미술사가들에 대한 비판적 용어이며, 분리주의는 비평분야 행동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본질주의는 미국서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용어이다. 사실 이런 용어들은 나름대로 각각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일면이 
        있기는 하지만, 수정주의와 분리주의가 행동주의 페미니즘의 전개과정에서 
        동시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나타났다는 것에 대한 이해를 덧붙여야만 한다. 

        여성주의 미술의 이슈들에서는 여성적 감수성과 여성이미지와 이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개괄되어 있는데, 여성적 감수성 문제는 본질주의 페미니즘과 연결된 
        문제이고 여성적 이미지와 이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일부 행동주의 페미니즘 
        노선과 맥을 같이하는 일면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행동주의 페미니즘, 여성주의 미술의 개념들, 여성주의 미술의 이슈들은 결국 
        70년대 중심의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입각한 1세대 페미니즘이라는 점에서 서로 
        묶이고 연결되는 것들이다. 

        마지막 절인 페미니즘의 개진-해체주의 이론과 정신분석학의 수용에서는 
        1세대와 2세대의 본질적인 차이가 나타나는데, 1세대가 여성적 본질 찾기였다면 
        2세대는 남성적 담론에서 제외된 여성적 타자 찾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남성적 담론의 해체와 여성주의 담론의 구축이라는 두가지가 서로 연관된 
        방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2세대 페미니즘에 근거한 여성주의 미술의 양상을 
        살펴보고 있다. 

        여기에서 간단하게 저자가 서구의 여성주의 미술운동을 정리하는 방식을 살펴 
        보았는데,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은 그가 한국미술에서 페미니즘을 논할 때는 
        언제나 '여성적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두가지 범주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서구의 여성주의 미술에서는 '여성적 미술'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침묵 또는 언급회피는 전체적인 글의 구성에 있어서 
        범주를 일관되게 지속시키지 못하게 하는 불균형을 낳고 있다. 이는 결국 '여성적 
        미술'이 우리나라 화단의 특수성에 대한 현실논리로부터 나오는 한시적인 조처, 
        외적인 상황에 따른 개념이라는 것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켜 준다. 이러한 
        타협적인 개념은 가의 글에서 논리의 명료성과 체계성을 해치는 요소가 된다고 
        생각한다. 

        V. 한국의 여성미술과 여성주의 미술 
        우리나라에 있어서 여성주의 미술의 기점은 [여성과 현실]전(1987)이라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 시기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다(그는 88올림픽을 기점으로 두 시기를 구분하고, 우리나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착된 계기를 휘트니 비엔날레(1992)로 보고 있다). 그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파악하는 특징은 그가 페미니즘을 포스트모던 시기의 한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구미에서도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같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병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견해는 여성주의 미술의 기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한국여성주의 미술은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에 기반한 '여성미술연구회'(이하 
        여미연)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여미연의 전신은 민족미술협의회의 여성분과이다. 
        이들은 80년대 민중미술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여성 문제를 사회적 모순의 
        해결로부터 풀어나갈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미술계라는 제도를 
        놓고 볼 때 미술계 내에서의 전시활동과 미술계 바깥에서 노동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거나 시위현장에 쓰일 걸개그림을 그리는 일 등으로 나누어졌다. 몇몇 
        성원들이 양 영역에 겹쳐있는데, 후자의 활동은 민족미술 협의회의 특수한 분과인 
        민중연대실천위, 노동미술연구회 같은 조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들은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같이 호흡하면서 80년대 중반부터 87년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러나 87년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의 실패, 동서독 통일, 
        구소련 붕괴 등 '사회주의적'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든 국내외적 사건들이 
        연속됨에 따라 전망의 혼돈을 겪으면서 '사회주의'보다는 '페미니즘'에 보다 더 
        큰 비중을 두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여미연은 70년대 서구의 행동주의 
        페미니즘이나 20세기 초반 사회주의 혁명기의 여성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 경향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여성성의 문제는 간과하고 성의 문제를 계급의 문제에 일치시켜 여성을 하나의 
        착취받는 게급으로 환원시킨다...양식보다는 내용, 미학보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최초의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정립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조형적으로는 
        커다란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PP.202-203). 

        여미연을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를 살펴보자. 여미연 이전에는 '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진정한 의미의 여성주의 미술은 없다. '표현주의'의 80년대 
        활동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 주제를 일관되게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다룬 것은 
        아니다. 여미연 이전 시기로 가면, '여성적 미술'이라는 개념이 유효해진다. 
        1930-40년대 초창기 여류화가들 중에서 대표적인 작가는 나혜석이다. 그는 의식은 
        페미니스트이나 작품은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1950-7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여성미술에 대한 서술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작가는 `천경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논쟁점이 될만한 소지가 있는 것은 박래현의 작품을 '남성적 어법으로 
        비여성적 작업을 하는 모더니스트,' '비페미니스트'로 파악한 점이다. 그 이유는 
        '여성적 감수성을 표현하는 데 추상화가 너무 비인간적이고 객관적인 양식'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보다 면밀한 미술사적 고찰을 필요로 하는 논쟁점이라고 
        생각된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로 가면 후기의 최욱경, 김원숙이 주목을 
        받는다. 전체적으로 여미연 이전의 또는 여미연과 동시대였던 모더니즘 계열의 
        대표적인 작가는 천경자와 김원숙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학에서 80년대에 중산층 
        여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이해하는 페미니즘 문학이 어느 정도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을 어느 
        정도 기대하게 되는데 이러한 흐름에 '표현 그룹'이나 '30캐럿'이 이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미연 이후의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여성미술'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여성미술이 바로 
        [여성, 그 다름과 힘]전의 내용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 전시회는 4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윤석남, 박영숙, 서숙진, 조경숙, 류준화), 
        본질주의 페미니스트(김원숙, 유연희, 김명희, 김수자, 하민), 모더니스트 
        페미니즘(양주혜, 엄정순, 최선희, 안필연), 새로운 매체작업을 하는 
        페미니스트(이불, 홍미선, 김정하, 오경화, 홍윤아).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분류된 작가들이 80년대에 여미연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변모된 작품경향과 관계없이 그들에게 아직도 '사회주의적'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네가지 부류의 작가들 중에서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모던 여성주의 미술'에 들어갈 수 있는 작가는 서숙진, 조경숙, 
        이불, 오경화, 윤석남 등 4인의 공동작, '이제 크신 어머니께서 자고깨니' 
        정도이다. 그 나머지 작가들을 분류하자면 서구 여성주의 미술로 말하자면 '1세대 
        본질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본질주의 페미니즘을 확대시킨 의미의 '여성적 미술'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여성, 그 다름과 힘'이라는 
        전시명에 대한 고찰에서 확인한 바 있다. 이는 주디 시카고의 [여서의 집] 개념을 
        도입하여 갤러리 전체를 여성작품으로 꾸미려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처음부터 문제로 삼았던 '여성적 미술'로 분류되는 작가들을 다시 살펴보자. 
        김원숙이 본질주의 페미니스트로 분류되어 있지만, 김홍희씨가 여성주의 미술과 
        여성적 미술을 분류한 제1의 기준, 의식적이냐 아니냐의 기준에서 보면 분명히 
        그가 의식적인 차원에서 여성성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적 미술'로 
        분류된다. 이러한 '여성적 미술'에는 김원숙, 유연희, 양주혜, 김명희처럼 
        미술계의 중견 여성작가들이 들어간다. 이들은 일부 언론에서 '전시 주제에 대한 
        숙고 없이 안일하게 예전 식의 작품을 출품하였고 여성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는 작품을 여성이 그렸다는 이유로 출품시킴으로써 전시 주제를 흐려 
        놓았다'고 비판받았는데, 이러한 지적은 타당하다. 전시기획자는 '여성성'에 
        초점을 두고 그 '여성성'을 성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고 공격적으로 이용한 
        쥬디 시카고 식 '본질주의 페미니즘'과 남성적인 시각에서 규정된 여성성, 여성적 
        감수성의 개념에 더 가까운 '여성적 미술'을 감싸안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포스트모던 여성주의 미술'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여성적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이다. 

        VI. 페미니즘에 관한 논고들 
        책의 후반부에 속하는 논고들은 전부 8편이다. 다섯 분야로 나누어지는데, 
        여성학에 장필화의 '여성주의를 위한 단상,' 신학에 이선애의 '여성신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에 김채원의 '등불을 밝힘,' 연극에 심정순의 '새롭게 보기와 
        여성적 글쓰기', 류숙렬의 '나는 왜 페미니즘 연극을 할까?' 영화에 김소영의 
        '씨네 페미니즘; 실천과 전망,' 유지나의 '여성영화의 실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쉬웠던 점은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선두역할을 하는 여성학과 문학 
        분야에서의 여성주의 운동이 충분히고찰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다른 
        부분과의 균형을 갖고 서구의 흐름과 한국 내에서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좀더 
        체계적인 고찰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중 여성주의 연극과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심정순의 글에서는 여성연극과 여성주의 
        연극을 구분하면서, 여성주의 연극을 '여성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한 텍스트로 
        파악한다. 70년대부터 시작된 서구의 여성주의 연극을 개괄하면서 한국에서의 
        여성주의 연극을 번안극, 창작극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류숙렬의 글은 
        한국의 굿이 조선시대 여성의 억압된 현실로 인해 생긴 한을 풀어내는 해방적 
        기능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결국 이러한 굿이 한국적 의미의 여성주의 
        연극이라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주의 영화에 있어서 김소용의 글은 80년대 들어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 씨네 페미니즘을 '위기'의 관점에서 서술하면서 70년대 씨네 
        페미니즘의 전개양상을 서구의 이론적 논점을 중심으로 특히 여기에서는 영화는 
        투명한 매체인가, 여성관객은 과연 매조키스트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유지나의 글은 씨에 페미니즘을 장르로서의 여성영화, 다큐멘타리 
        여성영화, 새로운 형식실험을 시도한 아방가르드 여성영화, 극영화로서 
        여성영화의 주요 테마들, 제3세계 여성영화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책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페미니스트 예술 전반의 논의 
        주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이, 엘렌느 식수 등에 의해 기존 
        페미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과 해체가 일어나기 이전의 페미니즘 예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들의 위기,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예술의 가능성이 
        검토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페미니즘 예술은 아직 
        패러다임 전환의 과도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