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담론의 지속과 변동: 유교적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을 중심으로
        저자 심영희
        발간호 제051호 통권제목 1996년 제2호
        구분 ARTICLE 등록일 2010-01-27
        첨부파일 10. 한국 성담론의 지속과 변동 ; 유교적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을 중심으로_심영희.pdf ( 7.5 MB ) [미리보기]

        <목차> 
        Ⅰ. 사회역사적 배경 
        Ⅱ. 지속: 유교적 담론과 여성의 성 
        Ⅲ. 변화: 페미니즘 담론과 여성의 성 
        Ⅳ. 페미니즘과 유교적 담론 사이의 충돌과 연합 
        Ⅴ. 맺는 말 

        한국에서 성(섹슈알리티)(각주: 섹슈알리티는 아직 합의된 적당한 번역용어가 
        없고, 학자에 따라서 성, 성적인 것이라는 뜻의 성성, 성행위 이전의 욕망, 의식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전성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성이라는 
        용어로 쓰기로 한다.)은 최근까지 거의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다가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비로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에 대한 얼마 안되는 
        연구들도 성 폭력과 같은 소위 "일탈적" 성에 초점을 둔 것이었고(심영희, 1990, 
        1991, 1992; 이명 선, 1989; 박선미, 1989; 조주현, 1993) 오직 극소수만이 성 
        일반을 다른 것이었다.( 정대현, 1985; 정경자, 1990; 조형 장필화, 1992). 이러한 
        성연구의 부족은 한국문화에서 성에 대한 오랜동안의 침묵과 강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고 그래서도 안되었으며 심지어 가벼운 
        잡담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금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에 독특한 사회문화적 배경, 즉 극도의 성별 격리와 이중 성윤리로 
        특징되는 유교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세는 198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등장과 함께 변하기 시작한다. 

        이 논문은 여성학적 관점에서 한국의 성을 연구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성은 
        사회적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이론적 입장(Weeks, 1986)에 기반해 있고 이를 
        지지하려는 것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성은 사회의 다양한 관행과 함께 
        변화하는데, 그 이유는 성이 사회적 역사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 기반하여, 필자는 이 주장을 한국의 사례로서 뒷받침하려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페미니즘 운동의 등장과 함께 성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다루려고 한다. 필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기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성은 
        사회적 역사적 구성물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한국의 사례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이를 하기 위해서 필자는 푸코식의 언술분석(Foucault, 1977, 1979; Laqueur, 
        1990)을 시도하겠다.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성문제와 관련하여 필자가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성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담론들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그 중 
        지배적 담론은 어떤 것이며 그 주 내용은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성에 대한 담론은 유교적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부 페미니즘적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필자는 이 둘에 초점을 
        두겠다. 

        둘째, 개인 특히 여성의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성에 지속이 있었는가 아니면 
        변화가 있었는가? 아니면 지속과 변화가 다 있었는가? 여성의 성에 지속이 
        있었다면 그것들은 무엇인가? 유교적 담론이 이와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 
        관계는 어떤 것인가? 

        셋째, 개인 특히 여성의 성에 변화가 있었다면 그 변화는 어떤 것들인가? 이 
        변화들은 페미니즘 담론과 관계가 있는가? 페미니즘이 여성의 성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켰다면 이것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 운동 
        단체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페미니즘 담론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것은 
        주체로서의 여성에 관한 페미니즘 담론과 관계가 있는가? 

        넷째, 성이 사회적 역사적 구성물이라면, 이것은 사회의 여러 가지 관행과 함께 
        변할 것이다. 페미니즘 담론과 관행은 이 점에서 중요하다. 만약 페미니즘 담론이 
        여성의 성을 변화시키는데 별로 기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왜 그러한가? 
        페미니즘 담론과 유교적 담론 사이에 충돌이 있어왔는가? 아니면 연합이 
        있어왔는가? 이들 충돌과 연합은 어떤 것이며 이들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아니면 
        여기에 다른 어떤 것이 작용하고 있는가? 

        다섯째, 한국에서 성에 대한 유교적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에 영향을 준 배경적 
        세력은 무엇인가? 보다 구체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물적 기반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두 요인은 이 담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한국에서 여성의 상황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 두 요인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페미니즘 담론을 보다 강하게 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하며 여성이 주체로 서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이 두 요인과 관련하여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필자의 논의는 다음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우선, 필자는 문제의 역사적 
        배경으로서 조선왕조의 유교를 간략히 논의하겠다. 유교는 성을 포함하여 
        일상생활의 많은 측면에 아직도 광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한국의 성문제를 관통하는, 유교적 담론과 관련된 두 가지 핵심 테마를 
        언급하겠다. 그것은 1)조선왕조 기간동안 "은장도"와 "열녀문"에 예시되는 정절 
        이데올로기와, 2)남자와 여자, 본처와 첩 사이에 존재하는 성의 이중 기준이다. 
        비록 조선왕조 말기에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신여성"이 등장했을 
        때 변화의 조짐이 있었지만, 보통의 일반 여성에게 영향을 준 변화는 산업화 
        서구화와 함께 20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왔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필자는 현대 한국에서 개인 여성에게 나타나는 것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남아있는 성과 성에 대한 
        태도를 다루겠다 
        . 그리고 이러한 지속성이 유교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보겠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혼외 성관계 및 성폭력의 영역에서 행해진 이전 연구결과들에 
        주로 의존해서 논의를 하겠다. 

        그리고 나서 필자는 현대 한국에서의 성의 변화를 논의하겠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한국여성의 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운동단체의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 일부와, 이에 따른 법적 변화, 예컨대, 1993년의 "성폭력 특별법"의 입법 및 
        1993년의 최초의 성희롱 고소사건 등을 중심으로 논의하겠다. 여기에서는 
        페미니즘 운동 단체의 담론에 초점을 두겠다. 

        끝으로, 개인 여성에 나타난 성의 지속과 변화에 대한 이런 논의들을 종합하여, 
        필자는 성에 대한 유교적 담론과 페미니즘적 담론 사이에 충돌이 있었는지 
        연합이 있었는지 보기로 하겠다. 어떤 때는 페미니즘 운동은 유교적 담론을 
        비판하지만, 다른 때는 유교적 담론을 활용하는 전략에 의존함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의 모순을 드러낸다. 예컨대, 정절 이데올로기, 이중 성윤리, 및 
        정상적-비정상적 성에 대한 개념 등 페미니즘운동에 역행하는 논의들이 법의 
        변화와 피해자 도움을 위해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 사용된다. 그러나 크게 보면 
        이러한 충돌과 연합이 성의 사회적 구성 과정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성은 사회적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먼저 한국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Ⅰ. 사회역사적 배경 

        1.유교의 제도화 

        성과 성별 관계에 관한 한국문화는 조선왕조의 유교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 
        조선왕조 동안의 한국은 유교, 보다 구체적으로 신유교의 제도화로 특징될 수 
        있다(Deuchler, 1992). 신유교의 핵심 내용은 세가지 사회적 원칙, 즉 삼강으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충성스러운 신하, 효성스러운 아들, 그리고 정절을 지키는 
        여자이다. 

        신유교는 조선에서 변화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전례없는 정치적 담론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이것의 사회변동 프로그램은 
        실제로 적용 구현됨으로써 한국사회를 유교화했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 시기의 
        한국사회는 신유교에 의해 재조직되고 변형되었다(Deuchler, 1992). 이런 맥락에서 
        신유교는 고도로 구조화된 남계 혈족 집단에 기반해 있는 친족체계와 함께 
        조선시대 한국사회의 추동력이고 조직원칙이었다. 

        2.성격리와 이중적 성체계 

        신유교는 여성들에게 광범하고 깊숙한 영향을 미쳤다. 비록 유교는 남자(양)와 
        여자(음) 사이의 통합을 모든 인간관계, 인간 도덕 및 사회화 과정의 뿌리로 
        간주하지만, 그것은 양성 사이에 명백한 위계적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여자의 내적 또는 가정내 영역과 남자의 바깥 또는 공적 영역 사이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분리했으며, 여자에게 열등한 위치를 부여했다. 여자는 그녀의 
        윗사람에게 복종해야 했다. 즉 미혼일때는 아버지의 명령을, 결혼했을 때에는 
        남편의 명령을, 남편을 사별했을 때에는 아들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내적 영역을 바깥 영역에 종속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구분은 심지어 가구내에서 조차도 격리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남편은 
        대문 근처의 사랑채에 머물고, 아내의 거처인 안채는 중문 뒤에 가려졌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특정한 날에만 함께 잤는데 그 날짜는 통상 남편의 어머니가 
        골라주었다. 이 날짜를 선택하는 기준은 그것이 생식에 좋은가 아닌가 였다. 이와 
        같이 이 시기의 공식적 혼인 관계에서 성은 명시적으로 생식을 위한 것이었다. 
        쾌락을 위한 성의 자리는 없었다. 이것은 특히 아내, 즉 여성에게 그러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성적 쾌락을 주장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되었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는 남편, 즉 남자에게는 달랐다. 

        유교하에서 남자는 여러 명의 아내, 즉 본처를 취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본처 한 명과 몇 명의 첩을 둘 수 있었는데 그 숫자는 그의 관직의 등급에 
        따라 달랐다( Deuchler, 1992). 또한 남자들에게는 유곽이 있었다. 그리하여 
        남자는 첩이나 기생들과 함께 성적 쾌락을 추구할 수 있었다. 이를 제어하는 
        유일한 길은 첩의 아들이나 손자들을 상하위직 공무원 등용을 위한 과거시험에서 
        경쟁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결과적으로 공직진출을 금지하는 것 
        뿐이었다(Deuchler, 1992). 그리하여 남자들은 공식적 부문에서의 생식을 위한 
        성과 비공식적 부문에서의 쾌락을 위한 성 모두를 가질 수 있었다.⒁)2)조선조에 
        확대가족이 양반 계층의 이상적 가족형태였고 대부분의 서민들은 경제형편상 
        핵가족에 머물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조선조 성격리, 이중적 성체계, 남자들의 
        자유로움도 또한 현실적으로는 상류층 양반들에게 해당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민들이 비록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였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 특히 본처는 생식을 위한 성밖에 가질 수 없었다. 비록 몇몇 첩과 
        기생들은 쾌락을 위한 성을 가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첩들도, 그들의 사회적 
        출신이 무엇이건, 일단 혼인과 가족의 공식체계에 들어온 이상, 정절 이데올로기에 
        따라 행동하도록 전제되었다. 이리하여 유교하의 여성의 성은 심하게 
        억압되었었다고 말할 수 있다. 

        3.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정절이데올로기 

        유교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미덕 중 가장 큰 것으로서 정절, 즉 아내가 한 
        남편에게 헌신하는 것을 강조했고 논리적으로 한 혈족집단에게 헌신하는 것을 
        강조했다. 혼인관계의 배타적 성격에 대한 강조는 두 번째 남편을 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거해버렸다. 양반가의 젊은 과부는 남은 일생 내내 재혼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전제되었고 정부는 "열녀문"을 세움으로써 그러한 여자와 가족을 
        칭송하였다(박용옥, 1976). 

        그리고 이것은 경제적, 법적 및 제도적인 방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예컨대, 유교의 
        입법자들은 정절을 지키는 과부들을 "수신전"과 같은 특별한 경제적 조치로써 
        지원했다.(이 제도는 1466년 경제적 이유로 폐지되었다.) 경제적 유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적 제재였다. 1471년의 "경국대전"은 세 번 혼인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들이 고위 공직에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실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종대왕은 이를 확장하여 두 번째 결혼의 금지를 포함시켰고 이를 
        "삼강행실 열녀도"라는 제목의 한글판 책에 인쇄하였다. 1485년의 개정판 
        "경국대전"은 간통녀와 재혼녀의 아들과 손자들은 공직이나 군 요직에 등용될 
        자격이 없고, 그들은 첩의 자손들과 함께 상 하위직 공직 등용시험에 경쟁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재혼 그 자체는 불법화되지 않았지만, 재혼한 여자의 
        직속 자손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법적 함의는 과부가 두 번째 남편의 집에 
        들어가서 본처로서 기능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Deuchler, 1992: 
        p.279). 

        이러한 맥락에서 간통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간통은 엄하게 처벌되었다. 
        내실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던 먼 친척과 간통을 범한 어떤 양반 여성은 
        1423년에 단두형으로 처형되었고, 그녀의 연인은 유형에 처해졌다고 
        한다(Deuchler, 1992: 259). 또한 성폭력의 피해자를 위한 자리도 없었다. 양반 
        여성이 남성 공격자와 맞닥드렸을 때에는 그녀는 항상 품에 지니고 있는 
        "은장도"로 기꺼이 자살을 해야 했다(박용옥, 1976). 

        여기에서 이 시기의 정절의 개념은 주로 처녀성 또는 신체적 정절의 개념을 
        가리킨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비록 신체적 정절과 정신적 정절은 밀접하게 
        상호연관되어 있고 전자는 후자에 기반해 있다고 주장될 수도 있지만, 신체적 
        정절에 대한 강조는 명백하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된 "은장도"의 경우에서 
        예증된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이와 같이 여성에게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는 역할 ("정숙한 
        아내," "순종적인 며느리," "정절을 지키는 과부" 등)을 고안해내었고, 여성들은 
        이러한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는지 아니면 이에 대해 반항했는지를 가지고 
        기억되었다(Deuchler, 1992). 이리하여 주체로서의 여성은 유교에서는 아무 자리도 
        없었다. 성을 포함하여 인간의 열정들은 양성 사이의 유교적 위계질서를 보존하기 
        위하여 제어되어야 했다. 이리하여 여성의 공식부문의 성은 생식을 위한 성에 
        국한되었고, 정절 이데올로기는신체적 정절의 엄격한 기준에 기반하여 엄격히 
        집행됨으로써 여성의 몸을 구속하게 되었다. 



        Ⅱ. 지속: 유교적 담론과 여성의 성 

        산업화, 도시화, 서구화와 함께 사회내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지만, 유교적 담론과 이데올로기의 일부는 현대 한국사회에 아직도 남아 있다. 
        이것은 이중 성윤리와 정절 이데올로기의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대부분의 여성과 남성,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여성의 정절에 높은 
        가치를 둔다. 고속도로에서 강간범과 마주친 어떤 여성이 도망치다가 근처의 강에 
        빠져 익사했다는 사건이 이를 웅변으로 말해준다. 그리고 여성이 비록 자신의 
        잘못 때문은 아니지만 정절을 잃었을 때에는 그녀는 자신을 비난하고 정상적 
        여성의 삶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자살을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부 남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소유하기 위하여 이러한 정절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즉 여자를 강제로 강간함으로써 그녀에게 자신외의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대안을 남겨놓지 않음으로서이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간통을 하는 것은 
        한국문화의 이중 성윤리에 의하면 수치라기 보다 장점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이중 성윤리와 정절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일상생활속의 
        성행동과 태도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논의해보겠다. 이중 성윤리는 혼외 
        성관계에 대한 태도에 가장 잘 드러나 있고 정절 이데올로기는 성폭력에 대한 
        반응에서 가장 잘 예시되는 것으로 보여 이를 중심으로 논의하겠다. 

        1.이중 성윤리 

        이중 성윤리가 명백히 보여지는 영역 중의 하나는 혼외 성관계와 성도덕의 
        영역이다. 한국에서 혼외 성관계는 형법상 간통죄에 해당되는 범죄로서,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이것은 지금은 남편의 간통과 아내의 간통 모두가 처벌될 
        수 있는 쌍벌죄로 되어 있지만 1950년대 이 법의 원안은 아내의 간통만을 
        처벌하고 남편의 간통은 문제시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한 조사연구에 의하면(심영희 외, 1991; 심영희, 1991b), 조사대상 남자의 
        20.2%가 한번 이상의 간통을 했다고 응답한 반면 조사대상여자의 경우 2.9%만이 
        그러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성별 비대칭이 심각한 것이다. 
        그리고 간통을 경험한 남자들의 60% 이상이 이를 2번 이상 저질렀다고 응답했다. 
        남자들은 결혼전보다 결혼 후에 간통을 저지른 경우가 많은 반면, 여자들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그러나 기혼 여성들은 간통 경험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것으로 보이므로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더욱이, 간통을 저지르는 
        남자들 중 89.6%가 그들의 결혼관계가 강하다고 응답했는데, 이것은 남자들이 
        간통을 하는 것은 결혼관계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다른여자와 성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 남자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혼인관계 
        밖의 비공식적 성체계에서 성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이중 성체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같은 연구에 의하면 혼외 성관계에 대한 태도는 일반성의 정도에 따라서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도, 즉 누가 누구에게 어떤 혼인관계에서 이를 저질렀느냐에 
        따라서도 또한 달라진다는 것이다. 혼외 성관계 일반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는 
        응답자의 약 60%가 간통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나, 간통에 대한 
        보수적 태도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간통을 범하는 사람의 성별에 
        따라 달라짐으로써 이중 성윤리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자의 간통보다 
        남자의 간통에 보다 허용적인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자신의 
        배우자의 간통은 일반화된 타자의 그것보다 반대될 때가 더 많으며, 여자가 
        남편의 간통에 대해 반대하는 것보다 남자가 아내의 간통에 반대하는 경향이 
        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 상황에서의 간통에 대한 허용도를 보면, 사람들은 안정된 결혼보다 
        불안정한 결혼의 상황에서의 간통에 대해 보다 허용적이고, 매춘녀가 아닌 
        사람과의 간통보다 매춘녀와의 간통에 보다 허용적이며, 아내의 간통보다 남편의 
        간통에 보다 허용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여자가 매춘남성과 
        간통하는 것보다 남자가 매춘녀 아닌 여성과 간통하는 것에 대해 보다 허용적인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이중성윤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것이다. 

        2.정절 이데올로기 

        정절 이데올로기는 성폭력과 관련한 문제, 예컨대, 성폭력에 대한 남녀의 태도와 
        반응, 법과 법집행 절차 등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성폭력과 관련하여 한국에는 두 
        개의 법이 있는데 하나는 형법상의 "정조에 관한 죄" 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법상의 "성폭력 특별법"이다. 후자는 여성운동단체들의 압력에 의해 1993년 
        12월 제정된 것이다. 성폭력 관련법의 수와 강도를 볼 때 한국에서 성폭력이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정도는 매우 높다. 인터폴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공식 강간범죄율의 국제비교에서 3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1985년 13.4, 
        1990년 12.9). 이 범죄율은 숨은 성폭력을 고려할 때 더 높아진다. 서울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피해에 대한 한 연구에 의하면(심영희 외, 1990; 심영희, 
        1990), 1988년에 강간 피해의 발생률(incidence rate)은 인구 10만명당 485.9건 
        또는 0.5%에 달했다(1988년의 공식통계는 인구 10만명당 10.9건). 강간범죄의 
        일생동안의 확산도(prevalence rate)는 서울의 경우 7.7%였고, 강간미수는 
        14.1%였다. 

        이러한 높은 발생률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피해의 신고는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강간기수의 1.8%, 강간미수의 1.9%만이 신고되었고 나머지는 신고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심영희, 1990). 신고하지 않는 이유로서는 정절 
        이데올로기를 들 수 있다. 즉 피해자로 하여금 그 사건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게 
        만드는 사회적 편견(88.8%)이 그것이다.(제시된 다른 이유들은 형사사법 절차에 
        있어서의 불리함이 10.5%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된 이유들은 
        "내가 피해당했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 (25.0 %), "공격자가 잘 
        아는 사람이어서" (18.4%), "그 남자와 결혼해야 할 것 같아서" (14.5%), "그 
        당시에는 그것을 성폭력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 (16.4%), 그리고 "너무 
        당황해서 신고할 수 없었다" (14.5%) 등이었다. 

        신고하지 않는 이러한 이유들에는 정절 이데올로기가 분명히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사건을 감추려는 동기("내가 피해당했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는 정절 이데올로기의 영향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 남자가 잘 아는 
        사람이어서"라는 반응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째, 공격자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이 자기를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둘째 자기가 정절을 잃었고 따라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의미는 그 
        다음 반응 즉 "아마도 그 남자와 결혼해야 할 것 같아서"라는 반응에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가장 충격적인 반응으로서 현대한국에서 정절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것이며 이때 정절은 신체적 정절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해자가 신고하기를 꺼려하는 이유는 성폭력 관련법과 법집행 절차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정절 이데올로기는 여기에도 또한 반영되어 
        있다. 한국의 형법에 의하면 강간범죄는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 분류되어 있다. 
        여성운동단체들은 이의 개정을 요구하고 이를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범죄 또는 
        폭력범죄하에 재 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이것은 인구 일반과 특히 입법자들에게 정절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한지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다. 

        형사사법절차의 문제 중에서는 친고죄 조항이 또한 정절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심영희, 1990, 1991a; 박선미, 1989). 이 친고죄 규정에 의하면 피해자 
        자신이 신고해야만 형사사법 절차가 시작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즉 제 3자는 강간 
        사건을 신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조항의 입법취지는 정절 이데올로기와 
        수치에 민감한 문화가 팽배한 한국사회에서 여성 피해자(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친고죄는 의도한 대로 여성피해자를 보호하기보다 
        신고를 억제함으로써 성폭력을 실제로 증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한 예로서 소위 "가정파괴범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한국에 독특한 강간의 
        유형으로서 강도와 강간이 결합된 범죄이다. 한국에는 집에 침입하여 강도를 하고 
        남편이나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아내나 어머니를 강간하는 강도범들이 있다. 이들은 
        피해자들이 수치나 정절 이데올로기 때문에 신고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데 이것은 꽤 효과적인 셈이다. 그러나 그 결과 피해자의 
        가정이 깨질 때가 많은데, 이는 왜냐하면 남편은 아내가 정절을 잃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내와 같이 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에, 아마도 이런 강한 정절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탓으로 가정파괴범죄가 
        증가하였다(김상희 외, 1991). 그러나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피해자들로 
        하여금 숨기지 말고 말하게끔 자극하는 페미니즘 담론과 함께 이 유형의 범죄는 
        줄어들기 시작한 것 같다. 

        이 정절 이데올로기는 성폭력과 관련하여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하나는 피해자로 하여금 피해가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도록 하여, 사건을 
        신고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범법자들로 하여금 보다 쉽게 체포와 
        유죄를 벗어나게 함으로써, 보다 많은 성폭력을 범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적 담론은 페미니즘 담론에 맞닥드리게 되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Ⅲ. 변화:페미니즘 담론과 여성의 성 

        1980년대 후반에 성담론이 광고와 학술연구 등 공공영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록 이중 성윤리와 정절 이데올로기가 현대 한국사회에 아직도 
        팽배하지만, 변화도 눈에 띠기 시작한다. 광고와 학술연구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들은 3가지 토픽으로 분류될 수 있다. 즉 1)성의 개념 또는 목표의 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이중 성윤리의 변화, 2)성교와 상대방의 의미에 있어서의 변화, 
        3)여성의 성적 주체로서의 인식의 변화 등이다. 첫 번째 범주의 변화는 생식을 
        위한 성으로부터 쾌락을 위한 성으로의 변화로 특징되고, 두 번째 범주의 변화는 
        성기중심적 성에서 친밀성 중심 또는 관계중 심적 성으로의 변화로 요약되며, 세 
        번째 범주의 변화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으로부터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으로의 변화로 대표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을 개관하는데 있어서 이들은 서구적 경험의 "지연된 재연" 
        (Sumner, 1983)이라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즉 한국 사회는 서구사회가 몇 
        십년전에 겪은 것과 같은 종류의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서 이 세 
        토픽을 보다 자세히 논의하겠다. 

        1.생식을 위한 성에서 쾌락을 위한 성으로 

        성의 개념 또는 목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생식을 위한 성과 쾌락을 
        위한 성이 이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첩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이제는 그들은 간통의 범죄로 처벌될 수 있다.) 자녀수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 또한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자리를 잡았고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은 중매쟁이를 통해서보다는 사랑 관계에 기반하여 결혼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이제 아내는 정숙한 아내와 성적인 연인이라는 
        두가지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담론은 기혼여성을 목표대상으로 
        하는 잡지의 각종 광고와 특집에서 나타나는 "사랑받는 아내," "항상 애인같은 
        아내"라는 이미지에서 쉽게 발견된다. 

        성의 개념 또는 목표에 있어서의 변화의 예는 광고에 나타난 성담론에 대한 
        연구에서 분명하게 예증된다. 피임약 광고의 분석을 통한 한 성문화 연구에 
        의하면(정경자, 1990), 60년대 및 70년대의 피임광고는 "행복한 가정생활"을 
        강조했다. 다음이 그 예들이다. 

        "알맞게 낳아 훌륭하게 키운다" (사례 1) 
        "알맞은 자녀, 댁의 달콤한 가정" (사례 7) 
        "행복한 가정의 새 설계" (사례 9) 
        "알찬 보금자리에 행복한 가정" (사례 10) (정경자, 1990: p.86) 

        이 시기동안 성은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 가족의 문제였다. 그리고 성은 "결혼"의 
        경계안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관계였다(정경자, 1990: p.86). 이 시기의 피임광고의 
        대상은 결혼한 부부로서 이들 사이의 출산을 통제하고 임신을 피하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이 시기의 피임약 광고 담론에 반영된 규범적 성관계는 
        결혼한 부부 사이의 생식을 위한 성관계라고 의미화될 수 있다(p.87). 이것은 다른 
        목적을 위한 성(쾌락을 위한 것 포함)을 죄악으로 보고 억압하는 도덕이 이 
        시기동안에 지배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피임약 광고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우선 이 시기의 
        피임약 광고는 기혼여성을 목표대상으로 하는 잡지 뿐만 아니라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서도 또한 발견된다. 이것은 성과 성규범에 대한 인식, 특히 
        혼전 성관계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음은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서 발견되는 광고의 일부이다. 

        "사랑은 폭넓게 즐기세요" (미혼여성 잡지 사례 1)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미혼여성 잡지 사례 3) (정경자, 1990; p.88) 
        1970년대까지의 피임약 광고에 나타난 성관계가 "가족 생활"로 표현되는 결혼한 
        부부사이의 것이었던 반면, 1980년대에 나타나고 강조된 그것은 "사랑"이었다. 
        이것은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미국의 "미즈"잡지의 
        광고와 비교할 때 이것은 20년 정도 늦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받는 피임약" (사례 15) 
        "사랑을 생각할 때, 피임도" (사례 17) 
        "사랑도 피임도 깔끔하게" (사례 21) (정경자, 1990; p.88) 

        여기에서 "사랑"은 생식이 아니라 쾌락을 위한 성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것은 혼인관계로부터 혼전 및 혼외 성관계로 확장되었다. 

        쾌락을 위한 성으로의 추세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서울 가정법원에 
        접수된 최근의 이혼소송 사건에서 발견된다. 이 사례에서 남편과 아내 둘다가 
        이혼소송을 냈는데, 아내는 성적 불만족에서, 그리고 남편은 가족 갈등에서 였다. 
        신문보도에 의하면(조선일보, 1995년 5월 28일자) 아내는 매일 성관계를 하기를 
        원했지만, 남편은 바쁘고 피곤한 직장생활 때문에 아내를 만족시킬 수 없었는데, 
        이것이 시부모와의 갈등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가정법원은 양쪽 모두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혼을 허락했다. 

        이 사례는 아내가 이혼요구의 근거로서 혼인한 부부사이에서의 불만족스러운 
        성관계를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거론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제까지 아내가 이혼소송을 제기할 때에는 비록 실제문제가 성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혼인불화의 사유로서, 예컨대 성격 차이, 시부모와의 갈등 등 성적인 
        이유 아닌 다른 것을 들었다 

        . 그러나 이 사례의 경우에 아내는 공개적으로 성적 불만족을 표출하였다. 
        이것은 다 음과 같은 두가지 점을 예시한다. 첫째, 여성이 자신을 단순히 성적 
        대상이 아니라 성적 주체로 간주한다는 것, 둘째,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하여 이제 자신의 성적 욕망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 성체계에 있어서는 생식을 위한 성과 쾌락을 위한 성이 이처럼 
        통합되는 추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을 위한 비공식적 성체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성을 위한 유흥 장소가 많이 있고, 비록 젊은 남성들 
        가운데서는 감소하 
        고 있기는 하지만, 남성 쪽의 혼외 성관계는 아직도 많다(장수입, 1988). 또한 
        매춘이 번성함으로써 비공식적 성체계를 활짝 열어놓고 있다. 이와 같이 변화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적 부문에서는 이중 성체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성기중심적 성에서 관계중심적 성으로 

        눈에 띠는 변화가 있는 또 하나의 영역은 정절 이데올로기이다. 정절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매우 강력하고 남녀 모두에 의해 깊이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정절 이데올로기의 내용이 얼마간 변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정절의 개념은 처녀성 또는 신체적 정절의 개념에서 사랑에 기반한 
        또는 관계에 기반한 것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 같다. 이제까지 사랑과 성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리고 정절은 충실성 또는 정신적 정절이라기 보다는 신체적 처녀성의 
        개념을 지칭했다. 이처럼 한국의 성문화는 성기중심적 성으로 특징될 수 
        있다(정대현, 1985, 1988). 이것은 혼전 성관계에 대한 태도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예컨대 미혼여성은 "나는 비록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성관계를 해서는 안돼. 나는 
        결혼할 때까지 정조를 지켜야 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애인 또한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부 젊은 남성 중에는 결혼식때까지 약혼녀의 정조를 
        지켜주기 위해 매춘녀에게 가는 사람도 있다.(이로 인해 사실상 그는 자신의 
        정절과 약혼녀에 대한 충실성을 범하는 것이 되지만 말이다.) 이처럼 이 두 젊은 
        연인들은 서로 사랑하고 언젠가 결혼하게 되겠지만성관계를 갖지 않으려 한다. 

        이제 이런 것이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고 젊은 여성들은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결혼식 전에라도 그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서울의 한 
        여자대학의 여대생 1,5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서베이에 의하면, 44.8%가 혼전 
        성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26.9%는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95년 4월 26일자). 이와 같이 성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신체적 
        정절의 개념이라기 보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성의 분리에 반영된 신체적 정절의 개념은 성폭력에 대한 반응에서도 
        또한 볼수 있다(심영희 외, 1990; 심영희, 1990). 여성의 의식에서 강간기수와 
        강간미수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만약 성폭행이 강간미수로 끝난다면, 
        여성피해자는 이를 "불행중 다행"이라고 간주하고 그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고하지 않은 성폭력 피해자 중 강간미수 피해자의 3.1% 만이 
        미신고 이유로서 "그 남자와 결혼해야 할 것 같아서"라고 응답한데 비해, 
        강간기수 피해자의 14.5%가 그렇게 응답하였는데, 이것은 성폭력이 성관계로 
        간주되고, 여성의 정절 개념이 신체적 정절의 개념,보다 구체적으로 성기중심적 
        성의 개념에 기반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과 성의 통합, 성폭력과 성관계의 분리와 함께, 신체적 정절의 개념 
        또한 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성폭력과 성관계를 분리하는 의식의 발전과 함께 
        성폭력에 대한 여성의 태도는 보다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는 것이 되고 있다. 
        예컨대, 연세대 여학생 100명에게 실시된 캠퍼스내 성폭력에 대한 한 서베이에 
        의하면, 27%만이 "피해를 숨기겠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72%는 "복수를 하겠다" 
        (27%), "여성운동단체에 신고하겠다" (25%), "대학에 처벌을 요구하겠다" (21%)고 
        대답했다(동아일보, 1994년 11월 4일자; 심영희, 1994). 또한 성폭력을 포함하여 
        사랑에 기반하지 않은 강요된 성은 정절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예컨대, 한 여대생이 자신을 12년간 성적으로 학대한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1992년 
        근친강간의 경우에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 성학대를 알고도 그녀를 떠나지 않고 
        그녀를 위로하고 도와주었으며 그녀를 위해 그 의붓아버지를 죽이기까지 
        하였다(조선일보, 1992. 1. 19. 조주현, 1993). 

        우리는 이러한 태도들을 곧바로 행동으로 연결시키는데는 조심해야 하지만, 
        사랑과 성의 이러한 통합 및 성폭력과 성관계의 분리는 신체적 정절의 개념에 
        변화를 불러옴으로써 여성피해자들이 성폭력 신고를 보다 많이 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3.성적 대상에서 성적 주체로 

        또하나의 변화의 영역은 여성의 성적 주체에 대한 인식이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 
        성적대상으로 간주되어 왔고 심지어 여성자신들도 이를 당연시했다. 비록 이 
        개념이 아직도 강하지만 얼마간의 변화의 징조가 보인다. 이것은 
        여성운동단체들이 성폭력과 성희롱문제에 대처하는 노력에서 볼 수 있다. 

        성폭력문제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전에도 많은 양의 성폭력이 있었음에 틀림없었겠지만, 이것이 사회문제로 
        등장하지 못했다. 극단적인 성폭력의 경우들만이 신문에 보도될 뿐이었고, 보도될 
        때에도 "강간"이 아니라 "폭행"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심지어 "성폭행"이라는 
        단어도 회피되었다. 그러나 성폭력문제에 불을 붙인 몇몇 강간 사례들이 발생했고 
        이것이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그 첫 사건은 
        1988년에 발생한 것으로 한 기혼여성이 한밤중에 집에 돌아가는 길에 두 명의 
        젊은 남자로부터 공격을 당했는데 저항과정에서 그녀는 한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일부를 잘라놓았다. 가해자를 처벌받게 하는대신, 그 피해여성은 폭력과 상해 
        혐의로 체포되었다(여성신문, 1988). 다른 사례는 "한국판 테스"라고 불리는 
        사례로서 1991년에 발생했다. 9살 때 이웃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외상후 
        스트레스 증상을 겪고 있던 30세의 한 여성이 21년 후에 그 남자를 발견해서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성폭력이 여성피해자의 생애에 미치는 고통과 
        후유증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법정에서의 마지막 진술에서 그녀는 "나는 짐승을 
        죽였다!"고 말했다(여성신문, 1991). 또하나의 사례는 1992년에 일어난 근친강간 
        사건으로서, 21세의 여대생이 그녀의 남자친구와 공모하여 자신이 9살때부터 
        12년간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해 온 의붓아버지를 죽인 사건이었다(조선일보, 
        1992년 1월 19일자). 그녀는 지방법원에서 4년간의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고등법원에서 집행유예로 경감되어 석방되었다. 

        한국 여성운동이 페미니즘 운동으로 변형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운동은 포괄적 개념으로서 여성이 주요 담지자인 운동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을 위해 성차별과 성 불평 등의 상황을 제거 또는 
        교정하기 위해 수행되는 것을 지칭한다.(1920년대의) 
        민족해방운동에서(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치는) 가족법개정운동을 거쳐 
        70년대와 80년대의 여성노동운동에 이르기까지 많은 활발한 여성운동이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즘 운동은 80년대 이후 "여성노동에 있어서의 평등권 운동", 
        "또 하나의 문화 운동" (1984-), 매맞는 여성을 위한 "여성의 전화 운동" (1982-), 
        "성폭력 대처운동" (1991-) 등이 형성되면서 비로소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단체들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상담하고 법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성폭력 사건들 앞에서 이들 여성단체들은 한계와 
        무능력을 느꼈다. 그들은 성폭력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보다 체계적인 노력을 
        해야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런 사건들의 여성피해자를 돕기 
        위해 연합전선을 펴기로 했다. 그래서 1992년 그들은 성폭력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피해자들의 상담과 법적 도움외에도 그 위원회는 "성폭력 특별법"의 
        입법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이 특별법의 초안에는 중요한 페미니즘 관점이 
        들어있었다. 예컨대, 그안에는 1)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가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규정하는 것, 2)친고죄를 폐지하는 것 등이 들어 있었다. 
        후자, 즉 친고죄문제는 위에서 이미 논의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전자에 초점을 
        두겠다.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규정해야한다는 주장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성이 성적 주체임을 발견했다는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 
        이념은 여성 자신들이 그녀의 성적 문제를 결정해야 하고 이를 침해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범죄라는 것이다. 이것은 몇 가지 가정위에 서 있는데, 첫째는 여성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여야 한다는 새로운 깨달음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성적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고 심지어 여성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에 따라 
        행동해왔다. 둘째, 여성도 스스로를 표현하고 주장하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가정에 기반해 있다. 여성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회화되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주장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잘 모르고 이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 오해의 기반이 된다. 예컨대, 여성의 "노"는 "예스"로 
        해석되고 이는 특히 성관계에 있어서 그러하다. 따라서 성폭력을 줄이는 가장 
        근본적인 길은 여성 자신속에 있는 이러한 편견과 궁극적으로 남성들속에 있는 
        편견들도 또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들은, 비록 일반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못했고 1993년 성폭력 
        특별법속에 포함되는데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여성들의 성에 대한 태도 전반을 
        바꾸는데 얼마간의 효과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쾌락을 위한 성으로의 
        변화, 혼전 성관계와 정절 이데올로기에 대한 태도의 변화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1993년 한 대학조교에 대한 성희롱 사건은 자기결정권 원칙이 발전 강화한 
        또하나의 예이다. 이 사건에서는 남자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한 여자조교가 교수의 
        데이트 제안을 거절한 후 직장을 잃게 되었다.(동아일보, 1993년 11월 24일자). 
        그것은 일종의 고용조건형 성희롱이었다. 그 조교는 상황을 교정하기 위해 그 
        대학 총장에게 청원서를 보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학교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다. 이 대자보를 읽고 학생회와 학생동아리들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그 교수에게 사과하고 교수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 
        교수는 조교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 
        운동단체를 포함하는 공동대책위원회와 합동변호사회가 구성되었고, 그 조교는 
        이들의 도움으로 그 교수와 대학 총장과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공식 소송을 제기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소송사건이 
        된것이다(성희롱 공동대책위원회, 1994). 그리고 1심 재판결과 지방법원은 비록 
        대학총장과 정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 교수에게 
        손해배상으로 3천만원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동아일보, 1994년 5월). 그러나 이 
        사건은 고등법원에서 원고 패소판결을 내림으로써(1995년 7월) 페미니즘 운동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 유교적 가부장적 담론이 강건함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아직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이 사건의 중요성은 성희롱이 편재하고 당연시되는 문화를 가진 사회에서 
        성희롱을 사회적 문제로 만들었다는데 있다. 그러한 것이 성희롱인줄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많은 여성들의 의식을 고양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기 결정권 원칙의 발전이라는데 있다. 이 사건에서 
        피해여성은 숨거나 피하지 않고 발설을 했고 잘못된 것을 교정해주기를 요구했다. 
        남성들이 아무런 잘못한다는 생각도 없이 직장에서 여성을 건드리거나 
        여성앞에서 더러운 음담패설을 하는 사회에서, 그리고 여성들은 비록 불안하고 
        불쾌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하지 않는 사회에서, 이 사건은 피해자의, 
        즉 여성 자신의 느낌이 중요하고 주장되어야 함을 깨닫게 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패러다임 변천(Kuhn, 1962)과 같은 것이었다. 여성들로 
        하여금 그녀의 상황을 갑자기 인식하게 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를 
        규정하게 했기 때문이다. 성희롱이 일어났는지 아닌지 결정하는데 있어서 
        서구사회에서의 원칙은 남성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상황정의에 기반해서 
        판단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여성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상황을 
        규정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주체로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Ⅳ. 페미니즘과 유교적 담론 사이의 충돌과 연합 

        위에서 필자는 개인 여성에게 나타난 성의 지속성과 변화를 논의하였다. 이러한 
        지속과 변화는 동시에 일어나고 있으며 성에 대한 유교적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 
        사이에는 충돌과 연합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충돌과 연합은 성의 사회적 
        구성과정을 구성하고, 성이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사회적 역사적 
        구성물임을 보여준다. 예컨대,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 때는 유교적 담론을 
        비판한다. 그러나 다른 때는 유교적 담론을 활용하는 전략에 의존함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법의 변화를 위해서나 피해자를 돕기 
        위해서 페미니즘 운동은 유교적 담론, 예컨대 정절 이데올로기, 이중 성윤리, 및 
        정상-비정상적 성에 대한 개념 등을 사용한다. 그래서 성의 사회적 구성을 보다 
        잘 드러내고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페미니즘 담론과 
        유교적 담론의 충돌과 연합에 초점을 두고 논의하겠다. 

        우선 페미니즘 담론과 유교적 담론 사이의 충돌을 간단히 살펴보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변화의 과정에서 유교와 페미니즘 사이의 충돌은 쉽게 발견되는 
        것일 뿐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담론의 지속과 변화는 
        유교적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 각각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유교가 낡아빠진 성도덕을 부과한다고 비판하고 유교는 페미니즘이 
        여성을 가족 밖으로 유인해내고 성적 질서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충돌의 예들은 위에서 논의한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다. 즉 성의 개념, 정절의 
        개념,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 등에서 이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의 개념에 있어서 이 두 담론 사이의 충돌은 생식을 위한 성과 쾌락을 위한 
        성 사이의 충돌로 요약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페미니즘의 비판에 의하면 
        남성은 이중 성체계에서 생식을 위한 성과 쾌락을 위한 성 모두를 향유하는 반면, 
        여성은 정숙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양분화되어 하나의 성체계속으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들은 페미니즘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교적 이중 성윤리를 유지하고 있고, 유교와 가부장제에 의해 묵시적으로 
        지지되는 이중 성체계는 여전히 견고해 보인다. 

        정절의 개념에 있어서 충돌은, 유교가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정절을 지지하는 
        반면,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 정절을 지키든지 아니면 남녀 모두 정절을 지키지 
        말든지 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둘 사이의 충돌이다. 유교적 담론은 아직도 
        여성의 정절을 강력히 주장하는 반면, 페미니즘 담론은 정절 이데올로기에 대해 
        점점 더 비판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정절의 
        개념을 부셔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까지 한다. 왜냐하면 정절이 성폭력 문제를 
        악화시키고 여성을 정숙한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의 두 집단으로 양분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정절 이데올로기가 가부장적 여성통제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충돌은 성폭력의 영역에 가장 명백히 반영되어 있다. 페미니즘은 정절 
        이데올로기가 여성들을 신고하지 못하게 막고 여성피해자들이 보다 많이 보다 
        오래 고통을 받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교는(이는 보수주의의 형태로 
        나타날 때가 많은데) 여성들이 행동을 반듯이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 피해자 유발을 암시하고 강간신화를 강화한다.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개념과 관련해서 유교는 가족을 여성의 장소로 
        강조하고 여성에게 주체로서의 존재를 부인한다. 유교에서 여성은 역할의 
        의인화로, 즉 다른 아무 것도 아니고,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규정될 
        뿐이다. 유교외에 성의 상품화,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성의 
        상품화는 여성을 광고에서 성적 대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과 
        심지어 여자들 자신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해 페미니즘 
        담론은 여성의 대상화를 비판하고, 여성이 성적 주체로서서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의 의식고양을 요구한다. 

        성의 개념, 정절의 개념,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개념 등에서 나타나는 유교적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 사이의 충돌은 가부장제의 뿌리를 형성하는 가족법에 대한 
        충돌, 특히 동성동본 금혼규정에 대한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1989년에 개정되어 
        1991년 부터 시행되고 있는 새가족법은 많이 향상되어 이혼시 어머니의 친권과 
        아내의 재산분할 청구권 등의 여성의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남계중심적 혈족체계의 기반이 되는 조항, 예를 들면, 호주를 사실상 남자에게 
        제한하는 체계, 남계와 여계의 친족계산이 불평등한 동성동본 금혼조항 등을 
        여전히 포함하고 있다(심영희, 1989). 여성운동단체들은 이러한 조항에 날카롭게 
        반대하고 이의 폐지나 개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페미니즘 담론은 많은 경우에 유교적 담론을 비판한다. 
        이렇게 볼 때 페미니즘과 유교사이의 충돌은 이해할 만하다. 이는 또한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의도한 것이든, 의도되지 않은 것이든 연합의 
        상황도 일부 발견된다. 이러한 겉보기의 연합은 비록 의도되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페미니즘 운동 일반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겉보기의 연합에 초점을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여성운동단체들은 때로는 유교적 담론을 활용하는 전략에 의존하는데, 
        이는 페미니즘 운동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예컨대, 정절 이데올로기, 이중 
        성윤리, 및 정상-비정상적 성에 대한 개념들이 법의 변화를 위해서 또는 피해자를 
        돕기 위해서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 사용된다. 어쩌면 그들은 아직도 유교적 성 
        이데올로기와 성담론에 푹 빠져 있는 보수적인 변호사와 판사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유교적 요소와 논리를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연합은 여성을 성폭력, 간통, 성희롱 등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페미니즘의 
        노력이라는 상황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컨대, 1988년 한 강간사건에서 피해여성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가해자의 혀를 일부 잘라서 폭력과 상해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피고측 변호사들과 여성운동단체들은 그 행동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정당한 자기방어였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유교적 정절의 개념에 기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희롱 사건의 원고측 변호사들과 여성운동연합도 또한 유교적 담론의 논리에 
        의존했다. 그들은 그 조교가 성희롱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거절하거나 항의하지 
        않았는가의 이유로서 가해자가 유교적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계층의 하나인 
        교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간통에 대한 논쟁과 관련해서도 이러한 유교적 담론이 발견되는데, 
        여성운동단체들은 간통죄가 원칙적으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데 동의하면서도, 
        상징적 또는 심리적 억지의 효과가 있다는 근거에서 적어도 한시적으로 존치시킬 
        것을 요구했다.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 모두가 일상생활에 대한 국가통제가 
        보다 강화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주장은 국가의 보다 많은 
        통제를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보수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페미니즘 운동의 진정한 노선이 자유주의인지, 급진주의인지, 
        아니면 보수주의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매우 혼란스럽다. 



        Ⅴ. 맺는 말 

        성은 사회적 역사적 구성물이고 사회의 다양한 관행과 함께 변할 것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담론과 관행은 이점에서 중요하다. 한국에서 성에 대한 유교적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에 영향을 주어온 배경적 세력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페미니즘은 이들 세력들에 도전을 하고 이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의 페미니즘은 많은 것을 했고 또 잘 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는 또한 
        얼마간의 문제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결론을 맺으면서 필자는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세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페미니즘은 단기적 유리함을 위해서 유교와 연합을 하는 대신, 장기적 
        관점을 취해야한다. 그러나 위의 충돌과 연합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한국의 
        페미니즘은 편리한 곳에서는 지그재그로 왔다갔다 함으로써, 일관성있는 
        운동노선이나 원칙이 없는 것같다. 페미니즘은 그것이 자유주의적인 것이건, 
        급진적인 것이건 간에, 보수적인 것은 아니고 보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때로는 보수주의와 연합을 하는 듯이 보인다. 이것이 전략상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단기적 관점에서 볼 때 약간의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도움이 되기보다 
        운동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둘째, 장기적 관점을 취할 수 있기 위해, 페미니즘은, 그것이 어떤 입장을 취하건 
        간에, 그 기반을 견고하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페미니즘 
        운동과 페미니즘 이론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보다 많이 해야 한다. 그것은 
        페미니즘 담론을 보다 튼튼하고 효과적으로 만들고 여성이 주체로서 서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구체적 활동을 할 뿐만 아니라 일관성 있는 이론적 기반도 또한 
        찾아야 한다. 

        셋째, 페미니즘은 미래의 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 이들 변화 중에는 
        성 정체성의 변화도 포함된다. 성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도 대학 캠퍼스에 게이 동아리가 형성되고 있고 많은 학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동아일보, 1995년 5월 30일). 또한 페미니즘은 성의 변화가 
        불러올 결과가 무엇인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자유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푸코가 주장했듯이 비록 보이지 않지만 여성의 성과 몸에 대한 보다 많은 
        통제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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